/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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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홍대 경의선 숲길 공원을 찾는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기운이 처지는 날이면, 특별한 목적 없이그저 걷기 위해 가는 편이다. 홍대는 젊음을 상징하는 곳이다. 수많은 젊은이 그리고 K-팝 열풍 덕분인지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관광객까지 뒤섞여 언제나 북적거린다. 그 길을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 에너지를 조금 나눠 받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가끔, 그 활기 속에서 젊은 연인들이 거리 귀퉁이에서 다투는 장면을 보게 된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이고 있고, 누군가는 얼굴이 붉어진 채 상대를 노려본다. 어떤 커플은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침묵으로 버티고, 또 어떤 커플은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말을 쏟아낸다. 괜히 걱정스러운 마음에 ‘왜 저러지, 빨리 화해하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나치며 모른 척하면서도 정작 귀는 그들의 대화에 은근히 열려 있다. 참 할 일 없이 남의 일에 참견 많은 아저씨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길을 재촉한다.

그러다 문득, 한편으로는 그 갈등을 감당할 수 있는 에너지가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나에게는 싸움조차 귀찮은 체력과 삶의 무게가 있기 때문이다. ‘나도 저랬던 시절이 있었지’ 하는 생각이 뒤따른다.

안종도 - 연세대 피아노과 교수,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전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안종도 - 연세대 피아노과 교수,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전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돌이켜보면 갈등은 언제나 ‘다름’에서 비롯된다. 서로 다른 생각, 다른 성향, 다른 세계를 가진 두 사람이 만나면서 마찰이 생긴다. 그러나 바로 그 마찰 속에서 두 사람만의 길이 생겨나고, 그 길을 따라 사랑이 흐른다. 갈등은 피하고 싶은 감정이지만, 어쩌면 관계가 형식을 갖추는 데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조건인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가 연인 간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가족, 친구, 동료 그리고 결국은 나 자신과 관계까지, 모든 인간관계는 갈등을 포함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나는 자연스럽게 음악의 ‘소나타형식’을 떠올리게 된다.

음악의 신약성서로 불리는 소나타

소나타는 서양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형식 가운데 하나다. 어원은 ‘소리가 울리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소나레(sonare)’에서 출발했고, 고전 시대에 이르러서는 단순한 장르명이 아닌 정교한 사고의 구조로 발전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 슈베르트의 소나타는 물론이고, 특히 베토벤은 32개의 피아노소나타를 통해 이 형식을 인간 존재를 사유하는 철학적 언어로까지 확장했다. 그래서 그의 소나타는 흔히 ‘음악의 신약성서’라 불린다.

고전 소나타형식은 대략 ‘제시부–발전부–재현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제시부에서는 1주제와 2주제가 등장하는데, 이 둘은 대개 성격도 다르고 조성도 다르다. 1주제가 내향적이라면 2주제가 외향적인 성격으로 등장한다고 예를 들 수 있겠다. 이 상반성 덕분에 두 주제는 곧 갈등 관계에 들어선다. 이어지는 발전부에서는 이 갈등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주제는 잘게 쪼개지고, 방향을 잃고, 격렬하게 충돌하며 끊임없이 변형된다. 이 발전부야말로 작곡가의 상상력과 내적 사유가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이다. 그리고 재현부에서 두 주제가 다시 등장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제시부와 달리 2주제가 더 이상 낯선 조성이 아니라 1주제와 같은 조성, 즉 하나의 세계 안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수많은 갈등을 통과한 끝에, 두 존재가 하나의 세계에 머물 수 있게 되는 순간이다.

소나타에서 1주제가 처음 등장할 때는 하나의 성격, 하나의 인물이 소개되는 듯하다. 그러나 2주제가 등장하는 순간 상황은 급변한다. 2주제의 출현은 곧 갈등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 구조는 홍대에서 보았던 연인들의 싸움과도 닮아 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나의 사랑이라는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고, 오히려 그 갈등을 통해 관계는 더 분명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물론 갈등이 꼭 타인과 사이에서만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혼자 있을 때조차 우리는 내면과 외면, 이상과 현실, 상반된 가치 사이에서 끊임없이 충돌한다.

심리학에서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한다. 인지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는 인간이 자기가 믿고 있는 생각과 실제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현실, 혹은 이상적으로 그리는 자기 모습과 지금의 자기 모습 사이의 충돌을 경험하면서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에릭 에릭슨 역시 발달 과정에서 위기가 자아 형성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갈등을 중심에 둔 소나타형식이 오히려 서양음악에서 가장 완성된 구조로 평가받는다는 사실이다. 음악학자 찰스 로젠과 카를 달하우스는 소나타형식을 고전주의 음악의 중심부를 이루는 가장 완결된 구조 원리로 보았다. 갈등과 대립 그리고 재통합이라는 과정이야말로 음악을 살아 있게 하는 핵심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공연계를 봐도 소나타형식의 영향력은 여전히 절대적이다. 피아노소나타뿐 아니라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의 핵심 악장 대부분이 소나타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 만약 소나타형식을 제외한다면, 우리가 접하는 공연 레퍼토리 상당 부분은 사라질 것이다. 이는 곧 소나타가 지금도 현대인의 감정과 사고 구조를 깊이 건드리는 형식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삶은 하나의 완결된 소나타

그렇기에 소나타는 반드시 공연장에 가서만 만나는 음악이 아니다. 방금 거리에서 마주쳤던 연인들 갈등, 가족과 다툼, 직장 동료와 충돌 그리고 나 자신과 싸움까지, 우리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소나타를 살고 있다.

물론 모든 소나타의 내용과 길이가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작품은 발전부의 갈등을 짧게 스쳐 지나가고, 어떤 작품은 그 갈등의 시간을 과감하게 늘린다. 베토벤의 초기 소나타가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 ‘다비드상’을 떠올리게 할 만큼 균형 잡힌 고전적 비례를 지녔다면, 중기를 지나 후기 소나타에 이르러서는 형식의 비례가 흔들리고 발전부와 재현부 경계마저 모호해지는 파격성을 보인다. 그러나 이 파격은 형식의 붕괴가 아니라, 형식 안에서의 고뇌와 몸부림, 그 너머로 나아가려는 초월적인 시도였다. 베토벤은 이를 통해 소나타를 귀로 즐기는 음악의 차원을 넘어, 인간 존재를 사유하고 질문하는 철학적 형식의 반열로 끌어올렸다.

우리 삶도 다르지 않다. 갓 태어난 아기는 이제 막 소나타의 제시부를 시작했고, 누군가는 발전부를 지나고 있으며, 누군가는 재현부에 진입했을 것이다. 각자 갈등의 길이와 밀도는 모두 다르다. 그리고 그 인생이라는 소나타가 지니는 의미는 아마도 인생의 코다(종결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드러날 것이다.

형식이 어떻든, 비율이 어떻든, 그 모든 삶은 하나의 완결된 소나타다. 아이러니하게도 불안정한 갈등이 있기에 인생은 비로소 형태를 갖추고, 그 갈등을 통과한 뒤에야 하나의 완전한 세계로 귀결된다.

어쩌면 소나타가 수백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우리 삶속에서 연주되는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음악 형식이기 이전에, 인간 삶을 닮아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안종도 연세대 피아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