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조토 디 본도네, '예수의 탄생', 1304~1306년. (아래) 산드로 보티첼리, '동방박사의 경배', 1475년. /사진 위키피디아
(위) 조토 디 본도네, '예수의 탄생', 1304~1306년. (아래) 산드로 보티첼리, '동방박사의 경배', 1475년. /사진 위키피디아

어린 시절 교회에 다니지 않았던 나도 크리스마스에는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간 기억이 있다. 그날 나눠주던 단팥빵 덕분에, 크리스마스만큼은 교회가 낯설지 않았다. 이처럼 크리스마스는 종교를 떠나 누구나 나눔과 감사의 감정을 떠올리게 하는 날이다. 연말이 되면 거리 풍경도 달라진다. 트리 장식이빛나고 징글벨 음악은 한 해의 끝을 알린다.

크리스마스(Christmas)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크라이스트(Christ)와 예배를 뜻하는 매스(Mass)가 합쳐진 말이다. 성탄절, 곧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뜻이다. 미술사를 살펴보면, 수 세기 동안 화가는 예수의 탄생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려왔다. 구도와 색채, 인물 배치는 그 시대의 신학과 세계관을 반영한다. 많은 예수 탄생 그림은 거의 예외 없이 ‘빛’으로 표현되었다. 수많은 그림 속에서 왜 예수의 탄생은 하나같이 빛으로 그려졌을까.

정철훈 - 미술 칼럼니스트, 문화기획 프로듀서, 전 KBS아트비전 대표
정철훈 - 미술 칼럼니스트, 문화기획 프로듀서, 전 KBS아트비전 대표

조토 디 본도네, 중세를 끝내고 인간의 탄생을 그리다

예수의 탄생은 4세기 무렵부터 기독교 미술의 주요 주제였다. 베들레헴의 마구간, 아기 예수와 마리아·요셉, 하늘의 별을 따라온 동방박사. 이 도상은 오랫동안 반복되었다. 그러나 14세기 초, 조토 디 본도네는 이 익숙한 장면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렸다. 이탈리아 파도바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남아 있는 그의 프레스코화 ‘예수의 탄생’은 중세 비잔틴 성화의 상징성과 초월성을 벗어나, 탄생을 하나의 인간적 사건으로 표현했다.

그림에서 마리아는 몸을 기울여 아기 예수 쪽으로 상체를 내밀고 있다. 이는 예수의 탄생을 경배의 상징이 아니라, 엄마가 아이를 품에 안는 실제의 순간으로 바꾸어 놓은 표현이었다. 화면 아래에는 소와 당나귀가 보인다. 소는 율법과 희생의 세계를, 당나귀는 그 바깥의 이방 세계를 상징한다. 두 동물이 함께 아기를 바라보는 장면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넘어 모든 인류 앞에 구세주가 나타났음을 암시한다. 오른쪽에는 목자가 서 있고 그 위로 천사가 소식을 전한다. 하늘의 알림에서 땅의 증인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요셉은 화면 아래에 앉아, 근심 어린 한 인간으로 남아 있다. 이 그림에는 극적인 화려한 빛은 없다. 대신 화면 전체를 감싸는 것은 체온에 가까운 밝은 분위기다. 조토에게 빛은 신비의 효과가 아니라, 신이 인간의 세계로 가까이 들어왔다는 조용한 증거였다. 그는 초기 자연 원근법을 시도하며 서유럽 미술을 비잔틴 전통에서 벗어나게 했고 르네상스로 향하는 문을 연 결정적인 미술가가 되었다.

게르트겐 토트 신트 얀스, '밤의 탄생', 1490년. /사진 위키피디아
게르트겐 토트 신트 얀스, '밤의 탄생', 1490년. /사진 위키피디아

산드로 보티첼리, 신 앞에 선 인간의 얼굴을 그리다

조토가 예수의 탄생을 인간의 경험으로 표현했다면, 산드로 보티첼리는 그 탄생을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에 주목한다. ‘동방박사의 경배’는 예수 탄생 이후를 다룬 대표적 장면으로, 중세와 르네상스 미술에서 자주 나타나는 소재다. 별을 따라온 세 동방박사와 금·유향·몰약의 헌정은 신 앞에 모든 이가 경의를 표하는 순간을 상징한다. 1475년쯤 제작된 이 작품은 피렌체 은행가 가스파레 델 라마가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의 개인 예배당을 위해 의뢰했으며 오늘날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그림을 보면, 보티첼리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화면 중앙에 두고 그 주변은 반원형으로 둘러싼 인물로 배치했다. 긴 행렬 대신 삼각형 구도를 택해 시선이 자연스럽게 성모자에게 모이도록 했다.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폐허가 된 고전 건축물 위에 앉아 있는데, 이는 옛 질서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암시한다. 동방박사는 왕의 위엄보다 가족처럼 친밀한 태도로 아기 예수에게 다가간다. 화려한 의식은 절제되고 신 앞에서 권력과 신분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이 그림이 특별한 이유는 성서 속 인물 사이에 현실의 얼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가장 나이 든 동방박사는 메디치 가문의 창업자 코시모로, 무릎을 꿇은 인물은 그의 아들 피에로, 곁에 선 인물은 조반니로 해석된다. 화면 오른쪽 중앙에 관람자와 시선을 마주치는 노인은 후원자 델 라마이며 화면 오른쪽 끝 인물은 보티첼리의 자화상으로 알려져 있다. 피렌체의 권력자는 동방박사의 모습으로 신 앞에 서 있다. 별에서 내려오는 금빛 광선은 성모자를 정확히 가리키고 붉은색과 금색은 제단 위에서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보티첼리에게 ‘빛’은 초월적 신비라기보다 신의 탄생을 목격하는 인간의 얼굴을 드러내는 빛이었다. 이 순간 예수의 탄생은 종교를 넘어, 역사와사회 속으로 들어온다.

게르트겐 토트 신트 얀스, 어둠 속에서 태어난 빛을 그리다

보티첼리가 ‘동방박사의 경배’를 선보인 얼마 후 네덜란드 화가 게르트겐 토트 신트 얀스는 빛의 근원 자체를 바꾼다. 그가 1490년쯤 그린 ‘밤의 탄생’에서 더 이상 빛은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어둠에 잠긴 마구간 한가운데, 아기 예수의 몸에서 빛이 직접 뿜어져 나온다. 크기 34.5×25㎝의 이 작은 패널화는 개인의 기도와 명상을 위한 사적 신심화였다. 아기 예수의 빛은 마리아와 천사를 밝히고 언덕 너머 목동의 불빛보다 강렬하다. 요셉은 그림자 속에 서 있고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천사의 빛은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한다. 어둠 속에 황소는 조용히 아기 예수를 보고 있다. 밀착된 구도와 극적인 명암 대비는 이 작은 그림을 강렬한 체험으로 만든다. 여기서 빛은 배경이 아니라 메시지이며 주인공이다.

그래서 예수의 탄생은 빛이었다

예수의 탄생이 빛으로 그려진 이유는 감동을 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질서의 시작을 가장 단순하고 분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이 인식은 시간의 체계에도 남아 있다. 우리가 쓰는 연대 표기 AD는 ‘애프터 데스(After Death)’가 아니라 ‘아노 도미니(Anno Domini)’, 곧 ‘주님의 해에’라는 뜻이다.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시간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선언하는 표식이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한 종교의 기념일을 넘어선다. 크리스마스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역사를 나누며 시간을 새로 세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정철훈 미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