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은 인공지능(AI) 열풍과 거품론이 공존한 한 해였다. 관련 기업이 AI 칩과 데이터센터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지만 그만큼의 이익 창출은 불확실하다는 점이 거품론의 핵심 근거였다.
챗GPT로 생성 AI(Generative AI) 열풍을 주도한 오픈AI조차 2024년에만 50억달러(약 7조1925억원)의 적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극히 드물긴 하지만 이름이 알려진 AI 기업 중에도 지속 가능한 수익 모델을 구축한 곳이 있긴 하다. 페이팔의 창업자인 피터 틸과 현 최고경영자(CEO)인 알렉스 카프가 2003년 공동 창업한 AI 소프트웨어·플랫폼 기업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이하 팔란티어)가 그 주인공이다.
팔란티어의 2025년 3분기 매출은 11억8000만달러(약 1조6974억원)로 전년 동기대비 63% 증가했다. 순이익은 4억7500만달러(약 6832억8750만원)로 같은 기간 세 배 넘게 늘었다. 팔란티어 시가총액은 4310억달러(약 619조9900억원)로 삼성전자(5564억달러)를 바짝 추격 중이다.
팔란티어는 ‘고담’ ‘파운드리’ ‘AIP’ 등의 플랫폼을 개발하고 보유한 회사다. 고담은 중앙정보국(CIA), 전쟁부(옛 국방부) 등 정부 기관에서 사용하는 보안 특화형 데이터 분석 플랫폼이며 파운드리는 민간 기업을 위한 플랫폼으로 유통, 물류, 제약, 금융 등 민간 영역의 데이터를 통합 분석해 비즈니스 의사 결정을 돕는다. AIP는 생성 AI 기술을 기반으로 기업이 자사 내부 데이터를 활용해 챗GPT 스타일로 분석해 질의와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최신 플랫폼이다.
팔란티어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많은 기업이다. 우선 ‘팔란티어’라는 이름은 영국 작가 J. R. R.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 속 ‘천리안의 돌’ ‘멀리서도 들여다보는 돌’을 뜻하는 ‘팔란티르’에서 따왔다. 최고의 힘을 가진 자들이 적을 감시하고 정보를 탐색할 수 있도록 돕는 마법의 도구라는 의미다.
창업의 촉매 역할을 한 건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2001년 9·11 테러였다. 당시 미국 정보기관은 방대한 테러 관련 단서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정보의 ‘점과 점을 잇는 능력’이 부족해 사전에 위협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미국 정부는 ‘데이터 분석 역량’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봤다. 틸은 데이터 기반 금융 사기 대응 경험을 정부 차원으로 확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창업에 나섰다.
팔란티어 공동 창업자는 총 다섯 명이다. 틸은 초기 자금 지원 및 비전을 제시했고, 회장직을 맡았다. 스탠퍼드대 로스쿨 시절 틸과 친분이 두터웠던 카프는 2004년에 틸에게 영입돼 CEO를 맡았으며, 회사의 전략적 방향을 이끌고 있다. 스티븐 코언과 조 론즈데일, 나탄 게딩스는 프로토타입 개발에 참여했다.
창업 당시 틸과 카프의 정치 성향이 극과 극으로 갈렸던 것도 재밌다. 틸은 2016년 미국 대선 기간 내내 반(反)트럼프 성향이 강한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거의 유일하게 트럼프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인물이다. 반면 카프는 오랜 민주당 지지자로 알려져 있다. 팔란티어의 소프트웨어 ‘이민 라이프사이클 운영 시스템’이 최근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의 불법 체류자 추적·식별·추방 절차에 투입되면서 그의 사상적 변화에 관심이 쏠렸지만, 카프는 자신을 여전히 ‘경제적 진보주의자’로 자처한다. 팔란티어가 거품론을 비웃듯 견실한 재무구조를 갖춘 AI 기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뭘까. 성공 비결을 정리했다.
성공 비결 1│ 확고한 민주주의 수호 신념
정치적인 견해차에도 틸과 카프는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라는 확고한 공통의 신념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둘은 9·11 테러 같은 비극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미국과 동맹국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줘야 하며 소프트웨어 기술이 그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같은 믿음은 ‘데이터 분석을 통한 안보 혁신’이라는 팔란티어의 정체성으로 이어졌고, 9·11 테러로 안보 위기를 체감한 미국 정부가 주요 고객이 됐다.
CIA는 자체 벤처 펀드 ‘인큐텔(In-Q-Tel)’ 을 통해 200만달러(약 28억7700만원)를 팔란티어에 투자한 초기 투자사이자, 핵심 고객사다. 팔란티어가 ‘CIA가 직접투자한 유일한 스타트업’으로 불리는 이유다. 이어 미 연방수사국(FBI), 국토안보부, 해병대 등 미국 정부 기관이 잇따라 팔란티어 고객사로 합류했다. 이후 팔란티어는 실제 안보 현장에서 성과를 입증하며 존재감을 키웠다. 특히 고담이 9·11 테러의 주범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에 기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크게 주목받았다. 고담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통해서도 주목받았다. 카프가 전쟁 발발 3개월 만에 우크라이나로 직접 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고담 도입을 권했기 때문이다.
성공 비결 2│ 온톨로지 기반 데이터 통합 체계
“복잡하고 방대한 데이터를 수요자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의하고 분석해 정부와 기업이 실시간으로 최적의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소프트웨어를 판매한다.”
팔란티어가 자사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핵심 동력이 ‘온톨로지’라는 데이터 모델이다. 온톨로지는 단순한 데이터 분석을 넘어 데이터 하나하나에 의미와 관계를 부여해 주는 모델링 기법이다. 흩어진 정보를 구조적으로 연결해 의사 결정의 핵심을 빠르게 드러내도록 설계됐다.
이를 위해 엑셀이나 PDF, 텍스트, 이미지 등 여러 가지 형식으로 각 부서가 따로 관리하던 정보를 하나의 틀로 통합한다. 데이터 인풋과 아웃풋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어 의사 결정 과정이 단순해지고 소요 시간도 크게 단축된다.
온톨로지 기반 팔란티어 소프트웨어는 이제 테러범 추적과 마약 밀수범 적발 같은 정부 업무뿐 아니라, 투자은행의 사기 거래와 자금 세탁 적발, 제약사의 신약 개발 데이터 분석 등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효과는 실제 사례를 통해 입증됐다. 패스트푸드 체인 웬디스는 공급망 담당자가 과거 24시간이 걸리던 업무를 단 5분 만에 처리할 수 있게 됐다. 미국 통신사 AT&T의 경우 새 통신선을 설치하는 데 통상 5년이 걸리던 작업을 팔란티어 플랫폼을 통해 불과 3개월 만에 끝낼 수 있었다.
성공 비결 3│ 능력 중심의 유연한 조직 문화
“소프트웨어와 기술 개발은 관찰에 기반한 예술이자, 과학이다. (중략) 생산적인 소프트웨어 회사는 예술가 공동체와도 같아서 기질적으로 까다롭고 재능 넘치는 영혼으로 가득 차 있다.”
카프의 저서 ‘기술 공화국(The Techno-logical Republic)’의 한 대목이다. 실제로 팔란티어는 신입 사원에게 즉흥 연극에 관한 책을 나눠준다. 무대 위에서 즉흥 연기를 펼치는 배우와 기존에 없던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엔지니어가 서로 통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능력 중심의 유연한 기업 문화는 대졸 신입 사원 대신 고졸 인재를 채용하는 실험에서도 드러난다. 팔란티어는 올해 ‘능력주의 펠로십(Meritocracy Fellowship)’ 프로그램을 통해 10대 고교 졸업생 22명을 선발했다. 선발된 이들은 4개월 동안 월 5400달러(약 780만원)를 받으며 인턴과 신입 사원의 중간 형태인 단기 직책으로 근무한다. 이 프로그램을 우수하게 마친 이에게는 대학 학위 없이도 팔란티어에서 정규직 사원으로 일할 기회가 주어진다.
성공 비결 4│ 파견 엔지니어 제도
팔란티어는 소프트웨어 기업이지만 엔지니어를 고객 현장에 파견해 문제 해결에 나서는 ‘파견 엔지니어’ 방식을 채택했다. 운영 담당자·분석가 등과 협업하며 실제 업무 흐름과 문제점을 세밀하게 파악한 뒤 그 결과를 바탕으로 팔란티어 플랫폼(고담·파운드리 등)을 맞춤형으로 구성하는 것이 골자다. 즉시 실행 가능한 코드와 솔루션을 만들어내고 이를 현장에서 바로 시험·개선한다.
초기에는 월가 전문가가 “고비용·확장 불가 서비스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제기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팔란티어의 핵심 경쟁 우위로 꼽고 있다. 고객과 깊이 얽힌 만큼 충성도를 높이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