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통령이 정부 부처 업무 보고에서 교섭력이 부족한 중기 업체와 가맹점주들에게 대기업을 상대로 한 ‘집단행동권(단체행동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 논거다. 대통령은 1929년 미국의 대공황이 노동자의 교섭권 부재로 인한 ‘과소소비’에서 비롯되었으며, 루스벨트 이후 노동권 강화가 번영을 이끌었다는 설을 인용했다.
대공황의 원인은 경제사학계, 특히 케인스학파와 오스트리아 학파 사이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논쟁이다. 대통령이 언급한 노동자 단체행동권 금지가 대공황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은 ‘과소소비설’ 혹은 ‘임금 주도 성장론’의 역사적 기원이며, 케인지언의 지지를 받는 이론이다. 매리너 에클스 전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지적한 ‘거대한 흡입 펌프(Giant Suction Pump·생산되던 부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을 소수의 손에 들어가게 해 이들의 자본축적을 도왔다는 이론)’ 이야기나 2010년 국제통화기금(IMF)의 쿰호프와 랑시에르의 연구 등은 생산성 증가를 따라가지 못한 임금 정체가 가계 부채를 폭발켜 공황을 초래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반면 밀턴 프리드먼 등 오스트리아 학파는 정부의 통화정책 실패를 주된 원인으로 꼽으며 대립해 왔다.
노동자의 수입 부족이 경제 붕괴의 원인이라는 진단은 문재인 정부가 주창했던 소득주도성장론의 근거다. 이번 대통령 발언은 현 정부의 경제 철학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80년 전 미국 경제의 병리학적 진단을 대한민국 경제의 처방전으로 삼는 것은 위험천만한 ‘시대착오’다. 경제학 이론은 그 시대의 환경이라는 특수성 위에서만 유효하다.
첫째, 소득 불평등의 지형이 다르다. 대공황 직전 미국은 상위 5%가 부의 3분의 1 이상을 독식했으나, 현재 한국을 비롯한 분배 지표는 대공황 때처럼 극단적이지도 않고, 한국의 임금이 노동생산성보다 낮게 지급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리고 대공황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과 소득이 성장을 견인하는 것은 다르다. 오히려 유럽 사례가 보여주듯 과도한 평등 지향 정책이 경제 활력을 떨어뜨려 성장을 저해하는 역설을 경계해야 할 시점이다. 한국의 임금 상승률은 노동생산성을 꾸준히 추적해 왔으며, 문제는 대기업의 착취가 아니라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의 낮은 생산성 구조에 있다.
둘째, ‘개방경제’라는 환경 변수를 간과했다. 1930년대와 달리 지금은 자본의 국경 이동이 자유롭다. 정부가 중소기업의 카르텔(담합)을 합법화해 대기업을 압박하고 경영 비용을 강제로 높인다면 자본은 주저 없이 투자 환경이 좋은 해외로 떠날 것이다.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를 자처하며 국내 투자를 기대할 수 없다.
셋째, 혁신 대신 ‘지대 추구’를 부추길 우려가 크다. 시장에서의 치열한 혁신 경쟁 대신단체 교섭을 통한 파이 나누기가 이익 창출의 수단이 될 때 경제는 병든다. 대기업은 납품 원가가 공개돼 끊임없이 악마화될 것이며, 중소기업은 혁신보다 단체행동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한 지대 추구에 안주하게 될 것이다. 공급자 간 단체행동은 공정거래법이 금지하는 카르텔 행위이며, 노사 간 관계를 규정하는 법을 기업 간에 적용하는 이런 제도를 시행하는 나라는 없다. 이 정부는 상법개정안, 노란봉투법 등 이미 경제의 기본 질서를 바꾸는 많은 규제로 사업하기 힘든 나라를 만들어 왔다.
소득 재분배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시장을 왜곡하는 ‘가격 통제’나 ‘강제 협상’이 아니라 정부의 조세정책과 사회 안전망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시장 참여자끼리 진흙탕 싸움을 벌이도록 하는 것은 정부의 직무 유기이자 나쁜 형태의 개입이다.
과거의 위기에서 교훈을 얻는 것은 중요하지만 잘못된 유추는 독이 된다. 대공황의 유령을 불러내 한국 경제의 근간인 자유시장 질서를 흔드는 ‘위험한 실험’은 멈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