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한국 과학계의 키워드는 ‘연구 생태계 복원’과 ‘인공지능(AI)’이다. 2024년 삭감 논란을 거친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은 2026년 35조5000억원으로 확정돼 2025년(29조6000억원)보다 5조9000억원(19.9%) 늘었다. 예산이 복원된 만큼, 질문도 ‘얼마나 늘렸나’에서 ‘어떤 성과를 무엇으로 측정하고, 어떤 방식으로 발견을 만들 것인가’로 옮겨간다. 정부는 연구 전 주기에 걸쳐 협력하는 AI 연구 동료, 과학기술 분야 AI 파운데이션 모델 등을 내세우며 2030년 노벨상급 성과를 목표로 든다.
하지만 최근 연세대 강연차 방한한 2001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팀 헌트(Tim Hunt) 프랜시스크릭연구소 명예교수의 진단은 결이 달랐다. 영국 생화학자인 그는 세포주기를 조절하는 핵심 단백질 ‘사이클린’을 발견해 릴랜드 하트웰, 폴 너스와 함께 노벨상을 받았다. 그는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AI 프로그램 알파폴드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과학은 지식이 아니라 무지를 다루는 일”이라며 “AI가 미지의 세계를 대신 탐험해 주진 않는다”고 말했다.
노벨상 수상 25주년이다. 삶에서 가장 큰 변화는.
“솔직히 말하면 돈이다. 노벨상 상금의 내 몫은 대략 4년 치 실수령 급여 수준이었다. 수상 첫해에는 강연을 80번이나 했다. 휴가를 빼면 주 두세 번씩 강연한 셈이다. 수요가 너무 많아 일정이 겹친 적도 있었다.”
연구자로서는 어땠나.
“노벨상 수상 뒤엔 ‘다시는 그렇게 중요한 발견을 못 할 것’이란 생각이 강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다시 연구의 흐름을 어떻게 찾았나.
“노벨상을 받고 한동안은 너무 바빴다. 그런데 경력 후반에 훌륭한 일본인 박사후연구원이 왔고, 우리는 새로운 질문으로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새로 파고든 질문은.
“분열기엔 단백질이 대거 인산화하지만, 분열이 끝나려면 인산기를 떼어내는 ‘탈인산화’가 필요하다. 당시엔 이 과정이 어떻게 제어되는지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실험을 통해 분열기 종료 후에는 여러 단백질에서 인산기가 한꺼번에 떨어지는 ‘대규모 탈인산화’ 가 필요하고, 칼슘 이온의 짧은 신호가 이를촉발할 수 있다는 단서를 우연히 잡았다. 그때 ‘칼슘에 의해 켜지는 탈인산화 효소가 있겠다’고 의심했고, 억제 실험을 거치며 종료에 단일 스위치가 아니라 서로 다른 효소가 순차적으로 작동한다는 그림이 더 분명해졌다.”
결국 우연보다 해석 능력 아닌가.
“맞다. 우연이 전부는 아니다. 작은 단서의 의미를 알아차려야 한다. 단서가 나오면 잡아야 한다. 언제 올지 모르니까.”
긴 연구 경력에서 느낀 ‘좋은 질문’이란.
“흥미롭고 중요하며 내가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뇌는 어떻게 작동하나’처럼 거대하지만 언제 ‘해결’이라 말할지 애매한 질문은 전략으로 나쁠 수 있다. 나는 답의 형태가 어느 정도 보이고, 언제 멈출지 판단 가능한 질문을 좋아한다.”
노벨상을 받는 연구는 어떤 질문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나.
“사람들이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긴 것을 해내는 길이다. 사이클린도 기술은 있었지만, 시간에 따라 관찰해야 ‘사라진다’를 알 수 있었다. 단순한 실험으로 현상을 확인하자, ‘이건 중요하다’는 걸 곧바로 알았다. 당시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AI로 노벨상급 성과를 내겠다고 한다. AI가 ‘불가능해 보이는 질문’을 찾게 해 줄까.
“알파폴드 같은 도구는 유용하다. 하지만 방대한 과거 데이터를 바탕으로 유추해 예측하는 면이 있고, 결국 실험으로 확인해야 한다. ‘새로운 불가능’을 발굴하는 일은 또 다른 문제다. 세포와 단백질, 소기관의 움직임엔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지금 단계의 AI가 미지의 영역을 대신 탐험하거나 실험 설계로 돌파구를 찾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게다가 AI는 실수도 하고 그럴듯하게 속이기도한다. 결국 질문을 ‘발견’하고 실험으로 밀어붙이는 몫은 여전히 사람에게 남아 있다.”
정부가 AI에 집중하는 전략은 위험한가.
“AI는 시대의 기술이니 연구해야 한다. 다만 ‘AI가 다 해결한다’는 기대는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델이 서로 다른 답을 내놓는 것만 봐도 검증이 필요하다는 신호다. 기차 시각처럼 답이 정해진 질문에는 AI를 많이 쓸 수 있지만, 최전선 연구에선 어디까지 맡길지에 신중해야 한다.”
한국의 과학 정책 결정자에게 조언한다면.
“과학은 비싸고 낭비가 많다. 대부분 탐색은 큰 돌파구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실용적인 문제만 풀라’고 하면 과학을 죽이는 길이다.”
대안은 무엇인가.
“기초와 응용의 균형이 필요하다. 발견이 나오면 개발·상용화할 사람도 있어야 한다. 응용은 기업이 더 잘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단기 성과 압박으로 ‘발견의 씨앗’을 말려 죽이지 않는 것이다.”
‘기초의 시간’이 길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면.
“메신저 리보핵산(mRNA) 백신이 그렇다.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에서 생명을 구했지만, 가능해지기까지 50년 가까운 축적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작은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쌓아 올린 결과다.”
하지만 정부의 과학 정책은 선거 주기처럼 짧은 주기로 움직인다. 과학 정책을 어떻게 다뤄야 하나.
“성패가 1~2년에 판정되지 않는다. 몇 년, 때로는 수십 년 뒤에야 ‘무엇을 살렸고 망쳤는지’가 드러난다. 정부에는 과학 언어를 정치의 의사 결정 언어로 번역해 줄 조언자가 필요하다. 그 간극을 메워야 단기 선택이 과학 생태계를 망치지 않는다.”
한국이 과학 성과를 키우려면 문화적으로 바꿔야 할 것이 있을까.
“첫째는 독립성이다. 시켜서가 아니라 호기심으로 움직이는 사람, 조금은 장난기 있고 조금은 말을 안 듣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리고 좋은 질문을 고르는 문화와 실패해도 다시 시도하게 하는 분위기다. 그리고 뛰어난 연구자가 서로 만나 함께 일할 구조가 중요하다. 나는 과거 기초과학연구원(IBS) 자문위원으로 일하며 ‘사람이 모이는 설계’의 힘을 여러 번 봤다. 과학은 완전히 평등하지 않다. 어떤 과학자는 다른 과학자보다 더 뛰어날 수 있다. 재능 있는 사람이 서로 자극하며 일할 때 진짜 진전이 나온다. 제도는 그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가능한 일’이 되게 해야 한다.”
결국 ‘AI냐 아니냐’보다 과학이 무엇을 하는 일인가로 돌아오는 것 같다. ‘과학은 지식 산업이 아니라 무지를 다루는 산업’이라는 말을 다시 설명한다면.
“사람들은 과학이 우리에게 확실성과 안정감을 준다고 생각하곤 한다. 나는 반대로 본다. 과학은 모르는 것을 찾는 일이다. ‘모르는 게 남아 있는 세계’가 좋다. 문제가 있어야 할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만약 AI가 언제나 정답을 뱉어내는 세상이 온다면, 과학자는 무엇을 하게 되나.
“끔찍하다. 우리는 일을 멈춰야 할지도 모른다. 다들 과학자가 아니라 팝 가수가 돼야 할 수도 있다(웃음). ‘모른다’가 남아 있는 게 오히려 건강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