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이 과거 말도 안 되는 선을 그어놓고 우리 행동을 속박하려 했습니다.” “그때의 함의가 지금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까?” 2025년 10월 말 인도 뭄바이에서 개최된 해양 안보(maritime security) 회의, 북극이사회(The Arctic Council)와 관련한 비공개 세션에서 러시아 학자와 북극이사회 당국자 간 대화 내용이다. 최근 다시 논란거리로 부상하고 있는 ‘그린란드-아이슬란드-영국 갭(GIUK Gap)’ 이야기다.
냉전 시기 북대서양의 GIUK Gap은 자유 진영이 북대서양에 설정한 대(對)소련 해양 저지선으로서 덴마크령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영국을 잇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말한다. 소련 해군, 특히 잠수함 전력의 대서양 진출을 차단하기 위한 이 선은 과거 19세기, 아니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막기 위한 전략의 연장선이다. 냉전 질서에서 GIUK Gap은 공산 진영이 넘어와서는 안 되는 선이었고, 그 선의 존재 자체가 북대서양 안보 질서를 규정했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이 저지선은 의미를 상실했고 GIUK Gap은 폐기된 개념처럼 보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공간이 다시 관심받고 있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저지선의 소멸과 전략적 공백, 냉전 유산에서 북대서양 새 관문
냉전 이후 북대서양 안보 환경은 구조적으로 변했다. 러시아의 국력이 급격히 약해짐에 따라 러시아 해군의 남하는 더 이상 위협이 아니었고,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대잠수함 작전도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GIUK Gap은 더 이상 방어선으로 기능하지 않았고 북극권은 1996년 북극이사회의 발족과 함께 관련 당사국이 평화롭게 지속 가능 발전을 도모하는 다자 협력의 장으로 인식되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며 이 지역은 개별 국가 입장에서는 일종의 전략적 공백 상태에 놓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공백은 오래가지 않았다. GIUK Gap을 둘러싼 모든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해빙과 항로의 현실화는 북극을 다시 국제정치의 중심으로 불러냈다. 희토류와 원유를 포함해 북극권 대륙붕에 매장된 엄청난 지하자원으로 인해 북극은 더 이상 ‘저 너머’가 아닌 모든 강대국이 주목하는 새로운 전략 공간으로 부상했다. 과거 남하를 막아야 할 선이었던 GIUK Gap은 이제 북극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주요 관문이 되었다. 장벽이었던 공간이 연결 지점이 된 것이다. 이 변화는 지정학적 사고의 전환을 요구한다. 더 이상 저지선이 아니라, 북쪽에서 무엇이 내려오는지를, 북쪽으로 누가 어떻게 진출해야 하는지를 관리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GIUK Gap의 세 축, 그린란드·아이슬란드와 영국은 관문을 지키는 문지기로 다시 지정학적 중요성이 커졌다.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 북극 전략의 전면화
이 변화는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집요하게 그린란드를 미국 영토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단순한 돌출 발언이 아니다. 미국은 북극을 전략적 핵심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린란드는 이미 미군의 핵심 기지가 있는 군사적 요충지이며, 중국과 러시아의 북극 활동을 억제하려는 미국의 전초기지다. 덴마크 자치령이라는 법적 지위와 무관하게, 전략적 현실에서 그린란드는 미국 북극 전략의 핵심 자산이며 이러한 현실은 앞으로 더 강화된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아이슬란드 역시 마찬가지다. 군대를 보유하지 않은 이 섬나라는 냉전기에는 나토의 조용한 후방 기지였지만, 지금은 유럽연합(EU) 북방 확장의 주요 타깃으로 떠오르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 안보 환경이 급변하면서, 아이슬란드는 북극 접근성을 확보하려는 EU에 전략적 가치가 있는 공간이 됐다. 미국 영향권에 있으면서도 EU 가입 논의의 중심에 다시 등장한 아이슬란드는 북극을 둘러싼 서방 내부의 이해관계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과 EU, 영국의 시선이 쏠리고 있는 현실은 아이슬란드에는 피하고 싶은, 그러나 피할 수 없는 부담으로 다가온다.
영국과 유럽, 러시아 북극으로의 이동 빨라져
영국은 GIUK Gap의 또 다른 축이다. 지리적으로는 유럽에 속해 있지만,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이후 제도적으로는 EU 밖에 있는 영국은 EU의 북극 전략에서 벗어난 존재가 됐다.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브렉시트는 EU 입장에서 북대서양에서 EU의 존재감을 약화하는 돌발 변수가 됐다. 그린란드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데 덴마크가 충분히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답답함, 그래서 자국이 직접 경영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거침없는 태도는 EU의 불안과 조바심을 가중한다. 이 와중에 영국은 재부상하는 GIUK Gap의 중요성을 전략적으로 관리할 열망을 품고 있다. GIUK Gap을 구성하던 세 축이 모두 각기 다른 방향으로 재배치되고 있는 셈이다.
한편 러시아는 전쟁 이후 북극으로 전략적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유럽에서 접근로가 차단되자, 러시아는 북극 연안을 군사적으로 강화하고 북극 항로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다른 회원국의 보이콧으로 북극이사회에서 협의와 조정 기능이 크게 약화했다. 공교롭게도 북극이사회의 핵심 멤버는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나토 회원국이다. 우크라이나와 전쟁으로 북극이사회가 러시아를 소외시키자 러시아는 북극권에한 발짝 물러나 있는 중국을 끌어들였다. 그린란드 주변을 러시아와 중국의 배가 둘러싸고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북극은 더 이상 협력의 공간이 아니라 경쟁과 충돌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전략 공간이 되었다. GIUK Gap의 부활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한국과 GIUK Gap, 관찰자에 머물 것인가
북극이사회의 옵서버(observer)인 한국에도 GIUK Gap은 추상적인 지정학 개념이 아니다. 북극 항로의 현실화는 그것이 러시아 연안을 경유하든, 알래스카–캐나다 축을 따라 형성되든 간에, 결국 북대서양으로의 출구인 GIUK Gap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완결될 수 없다. 조선·해운, 액화천연가스(LNG) 운송, 극지 연구 등에서 이미 북극의 이해 당사국이 된 한국에 GIUK Gap은 북극과 글로벌 시장을 잇는 전략적 관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관문을 여전히 ‘남의 안보선’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러·유럽·중국의 이해가 교차하는 GIUK Gap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북극 질서의 성격이 달라지고 그 결과는 한국의 공급망, 에너지 안보, 대서양 접근성을 포함한 해상 교통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라진 저지선 이후의 세계에서 GIUK Gap은 다시 질서를 만드는 공간이 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이 자국의 좌표를 그리지 못한다면, 우리는북극 질서의 형성자가 아니라 타국의 전략이 정한 좌표 위에 놓인 수동적 참여자로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