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 골프의 차세대 아이콘으로 떠오른 ‘돌격 대장’ 황유민(23)이 가세하는 2026 시즌 LPGA(미국여자프로골프)투어의 거대한 서막이 오른다. 1월 29일(현지시각)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레이크 노나 골프 앤드 컨트리클럽에서 열리는 ‘힐튼 그랜드 베케이션스 토너먼트 오브 챔피언스’가 그 무대다.
이 대회는 단순한 개막전이 아니다. 최근 2년간의 투어 우승자 39명과 스포츠·연예계 셀럽 50명이 어우러지는 화려한 ‘왕중왕전’ 이다. 디펜딩 챔피언 김아림을 필두로 임진희, 이소미, 유해란, 양희영 등 한국 선수 6명이 출사표를 던졌다. 세계 랭킹 1위 지노 티띠꾼(태국)과 2위 넬리 코다(미국) 등 쟁쟁한 별이 총출동하는 이 ‘별들의 전쟁’에, 한국 여자 골프의 새 희망 황유민이 루키로서 첫발을 내디딘다.
황유민은 지난해 10월, 비회원 신분으로 출전한 롯데 챔피언십 우승으로 LPGA 직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2023년 KLPGA(한국여자프로골프)투어에 데뷔해 3년간 3승을 거두고 세계 무대를 향해 비상하게 된 것이다.
이번 개막전은 컷 탈락 없이 모든 선수가 4라운드를 완주하는 방식이라 황유민으로서는 한결 여유 있는 마음으로 데뷔전을 치를 수 있게 됐다. 프로 선수는 스트로크(타수) 방식으로 우승자를 가리고, 셀럽과 아마추어는 변형 스테이블포드 방식으로 순위를 가리는 독특한 축제의 장이기도 하다.
박세리와 ‘세리 키즈’가 LPGA를 호령하며 한 해 15승을 합작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한국 여자 골프는 2020년대 들어 한 자릿수 승수에 머무르고 있다. 지난해 한국 선수의 합작 승수는 6승. 팬은 KLPGA투어 시절 어떤 상황에서도 핀을 향해 거침없이 쏘아붙이던 돌격 대장 황유민이 과연 정체된 한국 골프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을지 기대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작은 거인'과 '불사대마왕'의 조우
전장에 나가기 전, 장수는 전설적인 영웅을 찾아 지혜를 구하는 법이다. 황유민은 새해 벽두인 2026년 1월 6일, 서울의 한 스튜디오에서 e스포츠의 살아있는 전설 ‘페이커’ 이상혁과 마주 앉았다.
페이커는 e스포츠 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GOAT)로 꼽힌다. 지난해 월드 챔피언십 3연패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달성하며 통산 6회 우승의 신화를 썼고, 국위 선양의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체육훈장 최고 등급인 청룡장을 수훈했다. 10년 넘게 정상을 지키는 압도적 기량과 철저한 자기 관리는 그를 단순한 선수를 넘어 시대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황유민에게 페이커는 단순한 인기 스타가 아닌, 그녀가 지향하는 선수 생활의 ‘교본’과도 같은 존재다. 황유민은 2024년 4월 제주도에서 열린 두산건설 위브챔피언십을 앞두고 동료 이율린과 긴장을 풀기 위해 ‘리그 오브 레전드(LoL)’ 게임을 하면서 페이커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고 한다. 그녀는 “처음 PC방에 가서 롤을 시작한 주에 대회 우승을 차지해, ‘롤은 나에게 좋은 기운을 주는 존재’라는 믿음이 생겼다”며 웃었다.
황유민은 “페이커 선수가 데뷔 초부터 끊임없이 게임을 연구하고, 이미 모든 것을 이룬 후에도 변하지 않는 진심 어린 태도가 정말 멋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녀 역시 163㎝의 크지 않은 체구지만, 끊임없는 연구와 훈련을 통해 지면 반력을 이용한 폭발적인 장타를 만들어낸 집념의 승부사다.
황유민은 “승부욕이 강하면서도 늘 차분한 페이커 선수처럼, 나 역시 골프계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마인드 컨트롤과 롱런의 비결을 묻는 황유민에게 페이커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게임을 즐기듯 몰입하라”는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2, 3 지난해 10월 하와이에서 열린 LPGA투어 롯데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뒤 트로피를 들고 환호하는 황유민. 우승 확정 직후 동료 선수들의 물세례 축하를 받으며 기뻐하고 있다. /사진 대홍기획·뉴스1
'해리포터'와 '분유'
황유민은 올해 초 떠난 베트남 전지훈련에서 본격적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교재는 ‘해리포터’ 원서. 매일 한 쪽씩 읽으며 영어를 익히고 있다. 단순히 음식 주문을 위해서가 아니다. “영어가 되어야 경기 위원에게 상황을 정확히 어필할 수 있고, 동료 선수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생각을 들을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언어를 LPGA라는 새로운 커뮤니티에 진입하기 위한 필수 무기로 여기는 것이다.
작은 체구로 260야드를 넘나드는 장타를 뿜어내는 그녀에게 체력 유지는 지상 과제다. 루키 시절 급격한 체중 감소로 고전했던 그녀는 코치의 조언에 따라 단백질 셰이크 대신 아기가 먹는 분유를 선택했다. 처음엔 입맛에 맞지 않아 고역이었지만, 매일 아침저녁으로 분유를 타 마시며 근육을 지키는 모습은 화려함 뒤에 숨겨진 프로의 치열함을 보여준다. 기술적으로는 ‘유연함’을 더했다. “미국에는 힘 좋은 선수가 워낙 많아 장타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모한 공격 본능을 잠시 내려놓고, 다양한 트러블 샷과 정교한 쇼트 게임을 연마했다.
“지난해 (LPGA투어) 메이저 대회를 치르며 내 골프가 공격적이라기보다 조금 무모했다는 걸 느꼈다. 이제는 무조건 공격하기보다, 돌아가야 할 때는 전략적으로 공략하는 유연한 골프를 하려 한다. 돌격 대장이라는 별명에 갇히지 않겠다.”
목표는 1승 이상… 시즌 최종전 나가고 싶다
한국 여자 골프는 지금 중대한 변곡점에 서 있다. 태국의 티띠꾼, 미국의 코다, 일본의 야마시타 미유 등 강력한 경쟁자의 기세에 눌려 한국 선수의 우승 소식은 예전만 못하다. ‘LPGA 보릿고개’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스타성과 실력을 겸비한 황유민의 등장은 가뭄의 단비가 될 수 있다. 갤러리를 몰고 다니는 공격적인 플레이, 솔직하고 당찬 인터뷰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몰입’까지. 지난해 롯데 챔피언십에서 준우승한 김효주는 자신을 넘어 우승을 차지한 후배 황유민에게 “미국 투어 진출 축하한다, 잘 해보자”라며 따뜻한 격려를 보냈다.
황유민의 출사표는 다부지다. 신인왕을 콕 집어 말하진 않았지만, “꾸준한 성적으로 시즌 최종전인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에 출전하는 것 그리고 우승 트로피 하나를 들어 올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나만의 색깔로 팬의 기억에 남고 싶다”는 다짐도 잊지 않았다.
골프 인생 2막을 여는 황유민의 샷이 해리포터의 마법처럼 한국 여자 골프에 희망의 문을 활짝 열어주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