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익스페리먼트(Das Experiment)' 한 장면. /사진  
구글플레이
영화 '익스페리먼트(Das Experiment)' 한 장면. /사진 구글플레이

디지털 혁명에서 인공지능(AI)의 영향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이를 향유하는 리터러시(literacy·이해력)의 세대차는 우리나라에서 더 독특하게 드러난다. 개별적인 소통과 격려하는 반응에 익숙한 MZ 세대(밀레니얼+Z 세대·1981~2010년생)는 디지털 공간이 주는 자유를 편하게 느끼는 것 같다. 약자의 권리 의식이 강해지는 사회적 흐름과 같은 맥이 아닐까. 반면 직장의 상급자는 속도의 차이를 넘어, 자신과 결이 다른 반응 자체에 부담을 느낀다. 심지어 리더 역할을 맡기 꺼릴 정도다. 리더 직책을 배려의 미덕이 삭제된 ‘희생’으로 보는 것이다.

성인 발달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중년기 인생의 과업을 생성력(generativity)이라고 했다. 중년이 되면 살아온 날을 보던 시간 조망이 남은 시간을 셈하는 방향으로 바뀐다. 생산성이 정점에 이르는 이때 가정과 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남기는 일이 중요한 과업이 된다.

한태영 - 광운대 산업심리학 교수, 뉴욕주립대 산업조직심리  박사, 현 삼성전자 자문 교수, 전 산업및조직심리학회 회장
한태영 - 광운대 산업심리학 교수, 뉴욕주립대 산업조직심리 박사, 현 삼성전자 자문 교수, 전 산업및조직심리학회 회장

중장년 리더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소명(召命·calling)을 이루는 단계에 접어든다. 자기 역할을 발휘하라고 신(神)이 부른 수준에 이른다는 의미다. 일터는 관계로 얽혀 있는데, 그 관계 안에서 생성력은 곧 후계 양성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잘돼야 인생 후반기에 삶의 의미를 통합하는 과업을 이룬다. 반대로 후배를 경쟁자로 여기면 스스로 정체되고, 결국 모든 것이 헛되다는 절망감에 빠진 채 말년을 맞을 수 있다.

세대 계승을 위한 관계의 힘은 ‘존중’에서 나온다. 존중을 잃지 않도록 소통의 매너를 지키고, 그 매너를 잊지 않도록 규율을 세운다. 하지만 디지털 혁명을 거치면서 세대 간 관계는 오히려 더 약해졌다. 상급이지만 스위트 스폿을 맞추기 어려운 골프채처럼 관용성(forgiveness)이 좁아진다. 존중의 초점을 잃는 ‘미스샷’의 순간, 관계는 권력이 되고 조직은 동물적 서열 경쟁으로 기울기 쉽다.

영화 ‘익스페리먼트(Das Experiment)’는 존중받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준다. 심리학 실험에 20명이 참가한다. 전직 기자였던 주인공과 교사, 항공사 직원 등 평범한 사람이 통상 월급 이상의 참가비를 받고 ‘모의 교도소’에 들어간다. 참가자는 무작위로 간수와 죄수의 역할로 나뉘어 2주간 생활하기로 한다. 실험 규칙은 단 하나다. 폭력 사용 금지. 처음에는 웃고 떠들며 장난처럼 보이지만, 곧 갈등이 시작된다. 우유를 못 먹는 동료 대신 남은 우유를 마셔준 죄수가 가벼운 벌을 받는다. 죄수 역할의 주인공은 간수를 모욕한다. 권위를 존중받지 못한 간수는 점차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결국 5일째 간수의 폭력과 죄수의 탈옥으로 살인이 발생한다. 통제 불능 상태를 보며 그들 스스로 허탈해진다. 존중이 무너진 집단에서 힘겨루기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화의 바탕은 스탠퍼드대 심리학 실험이다. 실험에서 실제 살인은 없었지만, 수감자의 불안한 심리와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간수는 영화와 닮았다. 인간이 그렇게 변하는 모습 때문에 2주로 예정됐던 실험은 6일 만에 중단됐다. 

기업가나 승진자나 처음부터 자기에게 부여된 지위를 ‘권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개는 봉사하겠다고 말한다. 공동체의 출발은 그렇게 존중과 소통이라는 아름다운 약속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존중이 사라지는 순간, 역할은 권력으로 변질된다. 그래서 초심(初心)을 지키는 사람을 보는 건 신선하다.

AI 시대의 일터라 할지라도 관계에는 인간미가 있다. 다음 세대 육성이 인생의 과업임을 자각한다면, 자기 역할의 ‘그립’을 살짝 푸는 것이 리더에게 필요하다. 백세 시대답게 건재한 활동도 노욕(老慾) 앞에서 멈추는 것이 지혜일 게다. 동시에 MZ 세대는 위를 향한 존중의 매너를 통해 멘토를 만날 수도 있다. 그 존중이 인생 과업을 수행하는 선배의 보살핌으로 돌아올지 누가 알겠는가. 

한태영 광운대 산업심리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