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은 묵향 가득한 고을이다.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빼어난 유학자를 많이 배출했다. 선비의 기개, 가문과 학문에 대한 자부심, 뿌리 깊은 양반 사상 등은 안동에 뒤지지 않는다.
함양 지곡면에 있는 개평마을은 하동 정씨와 풍천 노씨 그리고 초계 정씨 세 가문이 뿌리를 내린 동네다. 조선 시대 성리학을 대표하는 동방오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일두 정여창(鄭汝昌·1450~1504)선생 고향이기도 하다. 이 마을에는 일두 고택을 비롯해 수백 년 동안 대물림해 온 유서 깊은 고택이 즐비하다.
고고한 선비의 기품을 느끼다
일두 선생은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다. 본관은 경남 하동이지만 증조부 정지의가 처가 고향인 함양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 함양 사람이 됐다. 일두의 이름은 원래 백욱(佰勖)이었지만, 그의 아버지와 함께 중국 사신과 만나는 자리에서 그를 눈여겨본 중국 사신이 “커서 집을 크게 번창하게 할 것이니 이름을 여창(汝昌)이라 하라”고 해 이름을 바꾸었다.
일두 고택은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지난 후에 후손이 중건했다. 고택에는 원래 17동의 건물이 있었지만, 현재는 사랑채· 안채·문간채·사당 등 12동만 남아 있다.
고택 입구 솟을대문 안쪽으로 홍살문과 함께 붉은색 목판에 흰 글씨가 쓰여 있는 5개의 편액이 눈길을 끈다. 이 편액은 나라에서 하사한 충효 정려(충신·효자·열녀가 살던 고장에 붉은색을 칠한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로, 집안의 자랑이자 자부심을 표현하는 하나의 징표다. 일두 선생의 조부를 비롯하여 후손이 하사받은 정려가 무려 다섯 개나 된다. 한 집안에서 정려를 다섯 개나 받은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마당에 들어서면 높은 축대 위에 다부지게 올라앉은 사랑채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충효절의(忠孝節義)’라는 글이 사랑채 벽면에 붙어 있다.
일두 고택을 나와서는 개평마을 고샅길을 따라 마을을 둘러보자. 순서는 따로 없다. 길이 나 있는 대로, 발걸음이 닿는 대로 그냥 걸으면 된다. 개평이라는 이름은 내와 마을이 낄 ‘개(介)’ 자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다. 개평마을 표지석이 서 있는 마을 입구에서 보면 좌우로 두 개의 개울이 마을을 가운데 두고 흘러 다시 하나로 합류한다. 마을과 잇닿아 넓은 들판이 펼쳐져 ‘개들’이라 불리기도 한다. ‘토지’ ‘다모’ 등 TV 드라마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개평마을에는 일두 고택 외에도 오담 고택, 노참판댁 고가, 하동정씨 고가 등 수백 년 된 전통 한옥이 잘 보전되어 있어 한옥박물관으로 불리기도 한다.
솔향 가득한 일두 가문의 가양주
개평마을에는 일두가 생존 때부터 담가 먹었다는 가양주가 전해져 내려온다. 송순(소나무 순)과 솔잎을 넣어 빚은 송순주다. 정여창의 16대손 정천상, 박흥선 부부가 빚고 있다. 송순주를 담글 때는 함양에서 생산된 쌀과 함양의 물 그리고 함양의 송순과 솔잎만을 사용한다. 감미료는 일절 넣지 않고 꿀을 조금 첨가하는데, 이는 술의 산패를 막아주는 방부제 구실을 한다.
송순주와 관련된 일두 선생의 일화도 전해지는데, 다음과 같다. “선생이 중년에 소주를 마시고 취해 광야에 쓰러져서 하룻밤을 지내고 돌아오니, 어머니가 매우 걱정되어 굶고 있었다. 이때부터 음복 이외에는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성종 임금이 그에게 술을 내린 적이 있었다. 그때 선생이 땅에 엎드려 이르기를 ‘신의 어머니가 살았을 때 술 마시는 것을 꾸짖으셨는데, 그때 신은 술을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하였사오니 감히 어명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임금이 감탄하며 이를 허락했다.”
송순주는 마음을 흔드는 은은한 향이 일품이다. 술잔을 코끝에 대면 은은한 솔향이 올라와 마음을 흔든다. 달빛이 내려앉은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송순주 한 잔을 마시노라면 번잡한 마음이 눈 녹듯 스르르 사라지는 것 같다.
조촐하지만 기품이 살아 있는 화림동 정자 기행
선비가 많다 보니 정자 문화도 발달했다. 무려 80여 개에 달하는 정자와 누각이 함양군 경승지마다 빼곡히 들어서 있다. 함양 정자 문화의 진면목을 맛보려면 안의면 화림동계곡으로 가야 한다. 화림동 계곡은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 사이를 굽이굽이 돌아가며 곳곳에 크고 작은 못을 만들어 놓았다. 예전엔 여덟 개의 못과 여덟 개의 정자가 있다 해서 ‘팔담팔정(八潭八亭)’ 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때 화림동 계곡을 대표하던 정자는 농월정(弄月亭). 밝은 달밤에 한 잔 술로 계곡 위에 비친 달을 희롱한다 해서 이름 붙여질 정도로 절경을 자랑한다. 하지만 2003년 화재로 소실되면서 그 아름다움의 빛을 잃고 말았다.
농월정에서 3㎞쯤 올라가면 계곡을 굽어보며 서 있는 동호정(東湖亭)이 모습을 드러낸다. 현재 화림동 계곡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정자인 동호정은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 몽진을 도와 공을 세운 장만리(章萬里)를 기리기 위해 1890년 후손이 세웠다. 동호정 앞에는 길이 60m인 커다란 차일암이라는 너럭바위가 섬처럼 떠 있다.
동호정을 뒤로하고 1㎞쯤 계곡을 올라가면 군자정(君子亭)이 나타난다. 군자정은 일두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후세 사람이 세운 정자. 커다란 돌 위에 사뿐히 앉아 있는 이 정자는 소복하고 조촐하지만, 기품이 살아 있다.
군자정에서 100여m를 더 올라가면 거연정(巨然亭)이 자리 잡고 있다. 누정 자체의 아름다움은 동호정이 앞서지만, 주변 경치가 수려하기로는 최상류에 자리한 이 거연정을 으뜸으로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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