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아버지가 갑자기 메일을 보내오기 시작했을 때, 이를 곧바로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책을 만들기 위해 편집 디자인 프로그램을 배웠고, 매일
서점에 가서 손에 잡히는 책을 몽땅 들춰보며 집요하게 디자인을 관찰했다. /사진 김진영
작가는 아버지가 갑자기 메일을 보내오기 시작했을 때, 이를 곧바로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책을 만들기 위해 편집 디자인 프로그램을 배웠고, 매일 서점에 가서 손에 잡히는 책을 몽땅 들춰보며 집요하게 디자인을 관찰했다. /사진 김진영

서점에 책을 입고하고 싶은 작가는 종종 자기 책을 가지고 서점에 온다. 일본의 아티스트 하타 사오리(八多沙織)도 그랬다. 그가 가져온 염소가 프린팅된 회색 슬립 케이스에는 작은 보라색 책이 담겨 있었다.

책 제목은 ‘아버지가 보내온 염소 이야기(The Goats my father talked about)’였다. 작가는 책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작가의 아버지는 탄자니아·방글라데시·이집트에서 수도 사업과 관련된 일을 하며, 몇 달 단위로 일본과 해외를 오가며 지냈다고 한다. 어린 작가에게 아버지는 가까워질 만하면 자리를 비우고, 잊을 만하면 이국적인 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돌아오는 존재였다.

2014년 일본 무사시노미대에 입학한 작가는 염소를 좋아하는 학생이 모여 있는 동아리 ‘염소부’에 가입했다. 대학 동아리가 염소에 관한 것이라니. 궁금해진 나는 작가에게 이 동아리에서 어떤 활동을 하냐고 물어봤다. 염소를 보러 가기도 하고, 염소 고기를 먹기도 하고, 염소에 관한 책을 보기도 한다고 작가는 대답했다.

김진영 -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
김진영 -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
어머니를 통해 딸이 염소부라는 수수께끼 같은 동아리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딸에게 ‘염소부의 사오짱에게’로 시작하는 메일과 출장지에서 본 염소와 그 지역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내왔다. 책에 실린 사진은 생각보다 질이 훌륭했다. 작가의 아버지는 사진에 진심인 사람이었던 걸까? 작가에게 이 점에 관해 물어봤다. 작가는 아버지가 사진에 꽤 진지했다고 대답했다. 출장길에도 필름 카메라를 챙겨갔고 다양한 렌즈를 썼다고 했다. 아버지의 메일에 아마추어 사진가로서 아버지의 면목과 사진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었다.

“오랜만에 꺼낸 니콘 필름 카메라로 찍은 방글라데시 사진을 보낸다. 2B 연필로 스케치한 듯한 거친 윤곽선이 아주 입체적으로 보이지?” “이번 사진은 아빠가 초등학교 때부터 써왔던, 네오판400이라는 귀한 필름으로 찍은 마지막 작품이다. 작년 봄에 이미 단종돼서 아빠가 미리 사 두었던 필름을 이번에 다 쓴 것이다. (중략) 역시 필름 사진은 독특한 빛의 계조(가장 어두운 부분부터 가장 밝은 부분까지 명암 단계를 세분화하여 표현한 것)가 있고, 초점이 맞지 않은 배경 같은 부분의 거친 질감이 회화적이다. 역시 사진은 필름이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는 염소 얼굴을 가까이에서 찍어 보았다. 카메라에 21㎜ 초광각렌즈를 달고 약 70㎝까지 다가가서 촬영했는데, 어떤 염소도 도망가지 않고 가만히 아빠를 바라보았다.” “오늘 마지막 사진이다. 세계유산 모스크에 몸을 기댄 채 쉬고 있는 검은 염소다. 아빠는 85㎜ 준망원렌즈로 배경을 흐리게 하여 촬영했다.”

아버지의 메일에는 홀로 떨어져 자신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자기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고 보고 싶은지, 같은 내용은 없었다. 염소와 관련된 정보, 지역 문화나 풍습, 유적지에 관한 이야기가 주로 담겨 있었다. 메일을읽다 보니 애정 표현에 서툴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가득한 그런 아버지상이 떠올랐다. 아버지에게 염소는 딸에게 메일을 보낼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였다.

하타 사오리 '아버지가 보내온
염소 이야기' 표지. /사진 김진영
하타 사오리 '아버지가 보내온 염소 이야기' 표지. /사진 김진영

아버지의 진심과 딸의 열정

작가에게 아버지와 가까운 사이였는지 물어봤다. 작가는 자신이 이미 대학생이었지만, 실제로 함께 지낸 시간이 적었던 아버지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말투로 메일을 썼다고 했다. 작가는 말했다. “많은 사람은 ‘아버지의 메일을 모아 책으로 만들다니, 정말 돈독한 부녀 관계였구나’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로, 아버지와 관계는 늘 멀고 차가웠다. 아버지가 메일을 보내기 시작한 것도 나와 다시 연결될 기회를 만들려는 그만의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메일은 다정한 부녀 사이에서 오고 간 기록이라기보다 딸과 가까워지고 싶은 아버지 마음이 담긴 것에 가까웠다.

작가는 아버지가 갑자기 이 메일을 보내오기 시작했을 때, 이를 곧바로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메일은 2여 년간 오갔다. 그동안 그녀는 책을 만들기 위해 편집 디자인 프로그램을 배웠고, 매일 서점에 가서 손에 잡히는 책을 몽땅 들춰보고 집요하게 디자인을 관찰했다. 작가는 자기 열정을 그만큼 끌어올려 준 건 다름 아닌 아버지의 메일에 담긴 매력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아버지 메일에서 느낀 가치와 감동을 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 책을 만들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진심 그리고 딸의 열정이 만난 덕분일까. 책은 독립 출판물로서 독특한 개성이 있으면서도 디자인적인 완성도도 갖추고있었다. 작가는 아버지의 메일과 사진뿐만 아니라 자기와 아버지가 관계된 다양한 요소를 책에 함께 수록했다. 어린 시절 자기가 그린, 캐리어를 들고 있는 아버지 초상화, 외국에 나가 있는 아버지에게 썼던 편지, 아버지가 귀국하는 날의 이야기가 담긴 어린 시절만든 만화책, 아버지가 기념품으로 사다 준 외국 우표 등이 책 중간중간 삽입돼 있다.

책은 아버지의 메일을 중심으로 극적인 사건이나 감동적인 상황 없이 가족 이야기를 덤덤히 풀어낸다. 그래서일까? 이 책을 보면서 나는 나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말로 다 전하지 못한 마음은 어떤 다른 형태로 남아 있을까? 작가에게 아버지의 메일이 있었다면, 나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이 책은 누군가의 특별한 가족사를 넘어, 각자가 마음속에 간직한 ‘전하지 못한 말’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