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2026년부터 탄소국경조정제도(CBAM·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를 본격 시행하면서 한국 수출 기업은 올해 수출 물량에 대한 탄소 비용을 내년부터 부담해야 한다. CBAM은 철강·알루미늄·비료·시멘트·전력·수소 등 탄소 집약 제품을 EU로 수출할 때, 해당 제품의 실제 배출량에 따라 EU 배출권거래제(EU ETS) 수준의 탄소 비용을 부담하도록 하는 제도다. 수출 기업은 제품 단위 배출량을 MRV(측정·보고·검증) 체계로 입증해야 하며, 이를 제시하지 못할 경우 EU가 설정한 불리한 기본값(default value)이 적용된다.
이 제도는 단순한 환경 규제를 넘어, 유럽 시장에서 경쟁 기준을 ‘가격’에서 ‘탄소를 반영한 도착 원가(landed cost)’로 바꾸는 산업·통상 질서 재편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산화탄소를 많이 발생시키는 ‘고로-전로(석탄으로 철광석의 산소를 분리하는 공정·BF-BOF)’ 비중이 높은 판재 중심 구조인 한국 철강 산업에는 구조적으로 민감하게 작용할 수 있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니콜 포이크트(Nicole Voigt) 금속 산업 부문 총괄은 “CBAM은 보고 의무가 아니라 상업적 경쟁력을 좌우하는 체계”라며 “한국 철강 산업은 기술적으로 강한 위치에 있지만, 제품 믹스와 탈탄소 전환 속도에 따라 수익성 등 유불리가 크게 갈릴 수 있다”고진단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CBAM이 글로벌 철강 산업의 비용 구조와 경쟁 구도에 어떤 변화를 불러온다고 보나.
“CBAM 아래에서는 탄소 배출량이 재무적 비용으로 연결된다. EU 국경에서 배출에 가격을 매김으로써 철강의 도착 원가가 달라지게 된다. 이는 생산 비용과 탄소 비용 결합 효과가 경쟁력을 결정한다는 의미다. 탄소 집약도가 높은 공정은 경쟁력을 잃는 반면, 탄소 효율이 높은 공정은 경쟁력이 올라간다. 특히 EU는 MRV 체계를 갖추지 못한 기업에 보수적인 기본값을 적용해 추가 비용을 부과함으로써 해당 기업 경쟁력을 급격히 훼손할 수 있다.”
한국, 일본, 중국, 인도 중 어디가 CBAM 대응 체제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하다고 보나.
“CBAM 경쟁력은 크게 세 가지 구조적 요인에 기반한다. 첫째, scope 1(철강 1t을 만들 때, 공장 안에서 직접 나오는 이산화탄소량) 배출(공정에서 직접 발생하는 탄소 배출) 강도다. 이는 CBAM 과금의 핵심이다. 둘째, 자국 내 탄소가격제(ETS)와 연계다. 국내에서 이미 탄소 비용을 부담한 경우 CBAM 부담액에서 차감이 허용된다. 의미 있는 배출권거래제도를 운용하는 국가의 경우, CBAM으로 인한 추가 부담이 줄어들며 탄소 가격으로 인한 비용 상승효과가 일부 상쇄된다. 셋째, 제품 단위의 검증된 배출량 보고 역량이다. 한국과 일본 철강사는 고효율 설비와 낮은 탄소 발자국을 보유할 가능성이 있지만, 탄소 배출량 데이터를 정확히 보고할 역량과 탄소가격제 체계를 얼마나 갖췄는지에 따라 향후 경쟁력이 좌우될 것이다.”
한국 철강 산업의 기술 수준, 탄소 집약도, 비용 경쟁력 등 현 위치는.
“한국 철강 산업은 기술적으로 강한 위치에 있지만, EU 수출구조가 중요하다. 대부분 유럽 수출이 판재(flat steel) 중심이며, 이는 고로-전로 공정 비중이 높은 만큼 scope 1 배출 강도가 높다. 이로 인해 CBAM 비용 부담이 커질 여지가 있다. 또한 저부가 제품(마진이 낮은 제품) 중심의 구조는 탄소 비용 증가가 실적에 더 크게 반영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MRV, 제품 전략, 탈탄소 전환 로드맵을 조합하는 기업이 경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 한국이 CBAM 체제에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나.
“단기적으로는 견고한 MRV 체계 구축이 핵심이다. 이는 규제 준수뿐 아니라 EU 고객과 상업적 신뢰 문제다. 저탄소 공정 전환은 장기 과제이며, EU와 통상 협상은 실질적 레버리지가 제한적이다. 한국 정부와 기업은 투명성 확보와 규제 준수를 우선하면서 중장기 탈탄소 전략을 준비해야 한다.”
정부가 철강 산업 탈탄소화를 위해 어느 정도 개입해야 한다고 보나.
“정부는 명확한 규제 프레임워크를 통해 산업 전환을 가능하게 하고 촉진해야 한다. 여기에는 저탄소 철강 선도 시장 조성, 공정 경쟁 환경, 자본·운영 비용 지원 등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투자 보조금과 탄소차액계약(CCfD) 같은 공적 지원은 비용 격차를 줄이는 데 도움 된다.”
CBAM 시대에 생산량 외에 경쟁력 기준은 어떻게 변할까.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은 기본 요건이다. 진정한 경쟁력은 ‘저탄소 배출 고부가 제품’ 능력이다. 특히 수소 기반 DRI-EAF(DRdi-rect reduced iron-electric arc furnace) 같은 최저 탄소 세그먼트에서 친환경 수요가 공급을 초과할 것으로 예상되며, 탄소 집약도는 품질·비용과 함께 핵심 경쟁 축이 된다.”
수소 기반 제철 또는 전기로(EAF) 확대 투자는 장기 수익성 훼손 리스크가 큰데, 기업이 전환을 결단할 동력이 있다면.
“이는 단기 수익성보다 구조적 변화에 의해 추진된다. 고급 강종은 저불순물 원료를 요구하며 기존 BF-BOF보다 DRI-EAF 공정이 적합하다. 이 과정에서 저탄소 에너지 비용, 가용성이 핵심 변수다.”
CBAM이 철강 산업 구조조정을 가속할 것으로 보나.
“그렇다. CBAM은 단순한 규모 경쟁이 아니라 글로벌 생산 위치 재편을 촉진할 수 있다. 저비용·저탄소 생산지가 경쟁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
향후 CBAM이 철강을 넘어 제조업 전반으로 확대될까.
“탄소 누출 방지를 위해 철강 파생 제품까지 CBAM이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 철강이 CBAM을 위기에서 기회로 바꾸기 위한 전략은.
“CBAM을 단순 보고 과제가 아니라 상업적 전환 프로그램으로 인식해야 한다. MRV, 철강 분야 포트폴리오 전략, 탈탄소 로드맵을 통합하는 구조화된 대응 프로그램을 구축하는 것이 관건이다.”
K-철강, 공급과잉·규제 압박 속 풀어야 할 과제는
한국 철강 산업은 공급과잉, 보호무역 강화, 탄소 규제라는 삼중고에 직면하며 설비 조정과 사업 구조조정을 본격화하고 있다. 특히 미국 철강 관세 부과, EU CBAM 시행, 중국발 저가 철강 유입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국내 업체가 체질 개선에 나서고 있다.
정부는 2025년 11월 ‘철강 산업 고도화 방안’을 발표하고 산업구조 재편에 착수했다. 철근 등 범용재 설비는 줄이고, 특수강·저탄소 제품 중심으로 전환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 세제 인센티브와 연계해 자발적인 설비 감축을 유도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조정을 단순한 설비 축소가 아닌, 고부가·저탄소 중심의 생산구조로 전환하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 구조조정이 성과를 내려면 기술혁신, 제품 포트폴리오 재편, 탄소 규제 대응 역량 강화가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