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발렌티노 가라바니. / 사진 발렌티노 가라바니 인스타그램
9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발렌티노 가라바니. / 사진 발렌티노 가라바니 인스타그램

재클린 케네디, 다이애나 왕세자빈, 엘리자베스 테일러, 줄리아 로버츠, 앤 해서웨이까지.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아온 스타일 아이콘인 그녀들은 발렌티노의 레드 드레스를 통해 여성의 당당함과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해 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1월 19일(현지시각), 이탈리안 럭셔리와 오트 쿠튀르의 아이콘 발렌티노 가라바니(Valentino Garavani)가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1960년대 로마의 비아 콘도티(Via Con-dotti)에서 시작된 발렌티노의 패션 세계는 이탈리아 오트 쿠튀르를 우아함, 세련미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는 스타일로 뒤바꾸었다. 발렌티노가 세운 미학의 제국은 섬세한 자수와 레이스, 테일러링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의 존재감을 극적으로 끌어올리는 실루엣에 있다. 발렌티노를 추모하며,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아이코닉 패션 신을 플래시백해 본다.

김의향 - 패션&스타일 칼럼니스트 현 케이노트 대표, 전 보그 코리아 패션 디렉터
김의향 - 패션&스타일 칼럼니스트 현 케이노트 대표, 전 보그 코리아 패션 디렉터

그 첫 패션 신은 재클린 케네디에게서 시작한다. 발렌티노 제국을 연 뮤즈는 단연 재클린이다. 이들의 인연은 1964년 가을, 뉴욕의 한 사교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보그’ 에디터이자 사교계 명사였던 글로리아 시프(Gloria Schiff)가 입은 발렌티노 투피스를 본 재클린은 그 자리에서 디자이너 이름을 물었다. 남편 존 F. 케네디 서거 이후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발렌티노가 지닌 정제된 세련미가 재클린의 마음을 열었다. 재클린은 발렌티노를 자기 뉴욕 아파트로 초대해 비밀리에 컬렉션을 관람했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자기 슬픔을 기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블랙과 화이트 위주의 오트 쿠튀르 의상 6벌을 주문했다. 이는 발렌티노라는 이름이 유럽을 넘어 미국 상류층과 전 세계 시선을 사로잡게 된 결정적인 순간이 됐다.

그리고 1968년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와 결혼식에서 선택한 아이보리 레이스 미니 드레스로 발렌티노 스타일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전 세계 이목이 집중된 이 세기의 결혼식에서 재클린은 화려한 웨딩드레스가 아닌 발렌티노의 ‘화이트 컬렉션’ 중 하나인 아이보리 레이스 미니 드레스를 선택했다. 하이 네크 디자인과 정교한 주름 장식 그리고 무릎 위로 올라오는 스커트 길이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발렌티노는 “재클린이 내 드레스를 입고 섬의 해변을 걷는 모습이 하나의 살아있는 조각상 같았다”고 회고했다. 발렌티노는 재클린을 위해 매 시즌 수십 벌의 옷을 제작했고, 그녀는 공식 석상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그의 옷을 즐겨 입었다. 특히 그녀가 즐겨 썼던 오버사이즈 선글라스와 발렌티노의 정교한 코트의 조합은 1970년대 ‘제트 셋(Jet-set) 스타일’의 바이블이 되었다.

발렌티노 드레스를 입은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 사진 발렌티노 가라바니 인스타그램
발렌티노 드레스를 입은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 사진 발렌티노 가라바니 인스타그램

재클린이 발렌티노 제국을 전 세계에 알린 뮤즈였다면, 다이애나 왕세자빈은 발렌티노의 미학인 자유와 당당함을 알린 주인공이었다. 1990년대, 찰스 왕세자와 불화와 왕실의 엄격한 규율 속에서 다이애나가 선택한 해방구는 패션이었다. 영국 디자이너만을 고집해야 했던 보이지 않는 제약에서 벗어나 발렌티노, 베르사체 같은 이탈리아 디자이너 옷을 선택했다. 특히 발렌티노의 옷은 수줍은 다이애나의 이전 이미지를 넘어 당당한 스타일 아이콘으로 빛나게 했다.

발렌티노 드레스를 입은 다이애나 왕세자빈. / 사진 발렌티노 가라바니 인스타그램
발렌티노 드레스를 입은 다이애나 왕세자빈. / 사진 발렌티노 가라바니 인스타그램

발렌티노는 그녀를 위해 하우스 시그니처컬러인 ‘발렌티노 레드(Valentino Red)’를 아낌없이 선사했다. 발렌티노는 다이애나를 회상하며 늘 그녀의 ‘독립심’을 강조했다. 생전 인터뷰에서 그는 “다이애나가 내 드레스를 입고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은 새장 밖으로 나온 새가 날개를 펴는 것 같았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특히 1994년 런던에서 열린 자선 행사에서 선보인 레드 벨벳 레이스 드레스는 두 사람의 미학적 교감을 보여주는 백미였다. 발렌티노 특유의 로맨틱한 레이스와 다이애나의 고전적인 우아함이 결합한 레드 드레스 룩은 그녀가 패션을 통해 자기 내면을 표현할 줄 아는 진정한 스타일리스트임을 증명했다.

2001년 제7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992년 발렌티노 빈티지 드레스를 입은 줄리아 로버츠. / 사진 발렌티노 가라바니 인스타그램
2001년 제7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992년 발렌티노 빈티지 드레스를 입은 줄리아 로버츠. / 사진 발렌티노 가라바니 인스타그램

발렌티노만의 패션 미학은 21세기 할리우드로 이어진다. 2001년 제7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여우주연상 수상을 위해 무대에 올랐을 때 입고 있던 드레스는 1992년에 제작된 발렌티노의 빈티지 드레스였다. Y 자 형태의 화이트 파이핑이 흐르는 블랙 벨벳 드레스는 절제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줄리아 로버츠의 특별한 선택은 레드카펫에서는 반드시 최신상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불문율을 깨뜨렸다. 줄리아 로버츠의 이 빈티지 드레스는 발렌티노디자인이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깊어지는 ‘타임리스 클래식’의 정수임을 보여준다.

2011년 제83회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카펫에 함께 선 앤 헤서웨이와 발렌티노. / 사진 발렌티노 가라바니 인스타그램
2011년 제83회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카펫에 함께 선 앤 헤서웨이와 발렌티노. / 사진 발렌티노 가라바니 인스타그램

줄리아 로버츠가 발렌티노의 과거를 현재로 소환했다면, 앤 해서웨이는 이 전설적인 쿠튀리에(couturier·고급 맞춤복 오트 쿠튀르 디자이너)의 황혼기를 찬란하게 장식한 뮤즈다. 2011년 제83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호스트였던 그녀는 발렌티노의 손을 잡고 레드카펫에 등장했다. 그녀가 입은 붉은색 빈티지 가운은 발렌티노가 정의한 ‘여성성의 극치’가 어떻게 새로운 세대에게 유산되는지를 확인하게 했다. 발렌티노는 2012년 앤 해서웨이의 결혼식을 위해 직접 핑크빛 웨딩드레스를 제작하며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1992년 봄·여름 컬렉션의 빈티지 발렌티노 드레스를 입은 젠데이아. / 사진 젠데이아 인스타그램
1992년 봄·여름 컬렉션의 빈티지 발렌티노 드레스를 입은 젠데이아. / 사진 젠데이아 인스타그램

앤 해서웨이는 로마에서 진행된 발렌티노 장례식에 참석해 그의 마지막 길을 동행했다.

줄리아 로버츠가 열고 앤 해서웨이가 이어온, 발렌티노 빈티지 오트 쿠튀르 아카이브는 다시 젠데이아가 가장 현대적인 방식으로 계승하고 있다. HBO 시리즈 ‘유포리아’ 시즌 2 프리미어에서 젠데이아가 입은 1992년 봄· 여름 컬렉션의 블랙 앤드 화이트 스트라이프 빈티지 드레스는 과거 슈퍼모델 린다 에반젤리스트가 런웨이에서 입었던 드레스다.

발렌티노는 떠났지만, 세대를 넘어 뮤즈와 함께 빚어낸 패션 신(scene·장면)은 변함없이 선명하다. 발렌티노만의 우아함은 다음 세대의 감각과 시선을 통해 패션 유산으로 이어질 것이다. 

김의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