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개봉한 이상일 감독의 일본 영화 ‘국보’는 평생 최고의 ‘온나가타’가 되기를 꿈꿔 온 두 인물의 교차하는 삶을 따라간다. 온나가타란 일본 전통극 가부키에서 여성 역할을 연기하는 남성 배우를 가리킨다. 나가사키의 야쿠자 두목의 아들로 태어난 키쿠오는 항쟁 현장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며 삶의 출발부터 폭력과 상실을 통과한다. 이후 우연히 그의 공연을 접한 간사이 가부키 명문 가문의 당주 한지로는 어린 키쿠오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그곳에서 키쿠오는 한지로의 친아들 슌스케와 함께 혹독한 수련을 거치며 본격적으로 온나가타의 길 위에 놓인다.
혈통을 중시하는 가부키 세계에서 키쿠오와 슌스케는 음양처럼 서로의 결핍을 비춘다.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정통 가문의 혈통을 갖추지 못한 키쿠오는 매 순간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반대로 가문의 역사를 잇는 당위성을 타고난 슌스케는 외적인 조건과 달리 아버지의 인정을 갈구하며 내적으로 결핍된 존재로 남는다. 이처럼 불안정하게 유지되던 균형은 다리 부상으로 무대에 설 수 없게 된 한지로가 친아들이 아닌 키쿠오를 자신의 대역으로 지목하면서 결정적으로 붕괴된다. 찬사를 불러일으킨 키쿠오의 무대를 지켜보던 슌스케는 끝내 자취를 감추고, 이후 가문의 계승자 자리에 오른 키쿠오 역시 순탄한 길을 걷지 못한다. 정통성이 결여된 그는 가부키 세계로부터 점차 밀려나고, 훗날 돌아온 슌스케는 가문을 등에 업은 채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이처럼 두 사람은 서로 엇나가는 방향에서 좌절과 회복, 상실과 전복이 반복되는 시간을 나란히 통과한다.
서로를 비추는 밝음과 어둠
끝내 국보로 호명되는 키쿠오의 삶의 지향점은 예술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순수성과 절대성에 대한 집요한 욕망은 필연적으로 폭력과 배제를 수반했다. 그는 정통 가부키 세계의 인정을 위해 혼외자 딸을 외면했고, 야쿠자였던 아버지의 존재 또한 스스로 지워야 했다. 원폭으로 어머니를 잃은 그의 삶은 애초부터 상실의 폐허 위에 세워진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이러한 키쿠오의 내면을 ‘쿠마도리’로 불리는 가부키의 화장 장면에 응축시킨다. 배우가 직접 얼굴에 분장을 완성하는 전통에 따라, 키쿠오는 무대에 오르기 전 자신의 얼굴 전체를 백색으로 덮는다. 그러나 이 백색은 단순한 소거의 표면이 아니다. 아버지가 살해되던 날 흰 눈 위를 붉게 물들였던 피, 백색 분장 위에 찍히는 붉은 선과 점 그리고 백색과 붉은색을 오가는 가부키의 의상 전환은 영화 전반에 걸쳐 색의 대비를 극대화하며 백색이 언제나 타자와 관계를 품고 있음을 드러낸다.
영화는 인공조명이 없던 17세기 에도시대 무대에서 인물의 표정을 선명히 드러내고, 탈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고안된 쿠마도리가, 상실과 결핍을 지운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전제함으로써 비로소 성립하는 형식임을 드러낸다. 절대적인 백색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가 아니라, 그를 통해 다른 존재를 드러내는 관계에서 완성된다.
카메라는 반복적으로 분장실에서 무대로 향하는 온나가타의 시선을 좇는다. 정리되지 않은 집기가 어지럽게 놓인, 좁고 긴 복도를 지나야만 마침내 관객에게 열린 무대에 도달하는 이 시퀀스는 키쿠오의 내면에 각인된 결핍이야말로 그를 예술의 경지로 밀어 올린 조건이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관점은 영화의 전개와 두 인물의 관계에서도 반복된다. 키쿠오와 슌스케는 서로를 지우는 존재가 아니라, 상호 교차하는 밝음과 어둠의 관계에서만 비로소 서사의 완결에 도달한다.
일본의 문호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1933년 발표한 ‘음예(陰翳·침침한 그늘) 예찬’에서 가부키의 진정한 묘미는 휘황찬란한 현대식 조명 아래가 아니라, 과거와 같은 어둠의 무대에서 되살아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사물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사물과 사물 사이에 드리운 음예의 무늬, 즉 음양의 관계에 있다. 야광 구슬이 어둠 속에서 비로소 광채를 발하듯, 음예의 작용을 벗어난 아름다움은 성립할 수 없다. 영화에서 키쿠오 없는 슌스케, 슌스케 없는 키쿠오는 존재할 수 없으며, 두 사람이 거울상처럼 함께 무대에 설 때 비로소 그 극은 가장 깊은 울림에 도달한다.
없음을 위한 백색 콘크리트 셀
일본 세토 내해에 자리한 데시마 섬. 바닷바람을 맞으며 다랑논 사이를 거닐다 보면, 방금 땅에 떨어진 듯한 물방울 형상의 데시마 미술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보는 각도에따라 표정을 달리하며 태양빛을 반사하는 백색 콘크리트의 유기적 표면과 하늘을 향해 눈처럼 뚫린 두 개의 커다란 개구부는 화장한 가부키 배우의 얼굴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미술관은 조형적 형식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그 안에 담긴 어두움과 비어 있음이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데 주력한다. 가로 60m, 세로 40m에 이르는 거대한 공간을 기둥 하나 없이 감싸는 콘크리트 셸 구조는 이 건축이 오브제로서 자신을 주장하기보다 하나의 환경으로 기능하고자 함을 조용히 드러낸다.
미술관에 이르는 동선 역시 이러한 태도를 반복한다. 방문객은 안내소를 지나 곧장 건물에 도달하지 않고, 나지막한 동산을 빙 둘러 걸으며 숲과 바다를 차례로 통과한 뒤에야 백색 입구에 이른다. 이 지점에서 방문객은 신발을 벗고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일상의 감각을 최소한의 상태로 환원하도록 요청받는다. 이는 밝음과 있음의 영역에서 어둠과 없음의 영역으로 이행하기 위한 감각의 재조정 과정에 가깝다.
미술관 내부에서는 밝음과 어두움, 있음과 없음이 교차하며 백색 콘크리트 면을 관계적 표면으로 전환한다. 인공조명이나 창은 개입하지 않고,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빛과 기후, 소리만이 공간의 상태를 규정한다. 2011년 건축가 니시자와 류에와 예술가 나이토 레이의 협업으로 완성된 이곳에는 독립된 오브제로서의 작품이 없다. 대신 바닥에 뚫린 작은 구멍에서 솟아나 맺혔다가, 이내 바닥 표면을 따라 매끄럽게 흘러가는 물방울의 현상만이 반복된다. 물방울은 흩어지고 합쳐지기를 되풀이하며 음예 공간의 풍경을 완성한다. 두 개의 개구부를 통해 빛과 바람, 비와 눈, 새소리와 곤충까지 유입되며, 미술관은 자연과 인간, 예술을 조화시키는 장소라기보다 그 경계가 느슨해지는 상태를 지속적으로 발생시키는 관계의 환경으로서 작동한다.
드러난 아름다움의 이면
25㎝ 두께의 얇은 표면을 중심으로 음양의 관계를 형성하는 미술관의 태도는 그 독특한 시공 과정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음새 없는 매끄러운 표면을 구현하기 위해 건축가는 흙으로 인공 지형을 조성한 뒤, 22시간에 걸쳐 한 번에 콘크리트를 타설했다. 이후 내부의 흙을 중장비로 걷어내며 모래성을 비우듯 대공간을 완성했다.
데시마 미술관은 이처럼 절대적이고 아름다운 백색의 표면 이면에 어둠과 날것의 공간을 그리고 한때 도드라졌다가 제거된 흙의 투박함을 동시에 품고 있다. 이는 인형극처럼 정교한 움직임과 발성을 반복 수련해야 하는 가부키 배우의 얼굴과도 겹친다. 하얀 분장 아래 감춰진 사연이 없었다면, 그 무대는 영화처럼 입체적인 울림이 없었을 것이다. 백색의 아름다운 얼굴은 결국 어둠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만 비로소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