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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설명│

‘기술 민족주의(Tech Nationalism)’가 2020년대 중반을 관통하고 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첨단 인공지능(AI) 칩을 상대로 미국으로 수입됐다가 재수출되는 물량에 25% 관세를 부과하는 조치를 1월 15일(현지시각) 시행에 들어갔다. 이는 과거의 중국 견제 수준을 넘어 유럽 같은 우방조차 미국의 기술 생태계 아래 무릎 꿇리겠다는 ‘아메리카 퍼스트’의 선언으로 보인다. 

독일 대표 제조 기업은 스마트 팩토리의 두뇌 역할을 하는 고성능 AI 가속기 수입 단가가 미국의 재수출 관세 영향으로 급상승하면서 전환 비용이 급증했다. 프랑스 데이터센터 운영 기업은 자국의 비싼 전기료를 견디지 못하고, 파격적인 에너지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제시하는 미국 애리조나주로 본거지를 옮기고 있다. 유럽이 ‘세계 최초의 AI 법(AI Act)’을 만들어 국제 표준을 선점했다고 자축하는 사이 실무 현장에서는 ‘법은 유럽이 만들고, 돈은 미국과 중국이 번다’는 자조 섞인 탄식이 나온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후 상시화한 러시아의 하이브리드 위협(재래식, 불규칙적, 테러, 범죄 수단의 혼합된 형태의 공격을 동시다발적으로 강행)은 AI 주권 문제를 ‘비즈니스’에서 ‘생존’의 영역으로 옮겨놨다. 실제 2026년 2월 초 발트해 인근의 일부 금융 시스템과 전력망이 친러시아 해킹 그룹에 의해 일시 마비됐는데, 유럽은 독자 클라우드 대안이 없어 미국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의 선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에너지는 비싸고, 자본은 마른 상황에서 미국의 변덕스러운 정책 한 번에 대륙 전체의 정보 시스템이 인질로 잡힐 수 있다는 공포는 극에 달하고 있다. 

필자는 이런 ‘AI 주권 공백’이 가져올 재앙을 경고한다. 그는 네덜란드 ASML의 EUV(극자외선) 노광 장비가 최첨단 반도체 생산 라인을 돌리는 핵심 병목 기술임에도 정작 유럽에선 이를 지렛대 삼아 자국 인프라를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거버넌스를 비판하고 있다. 규제라는 성벽은 높지만 정작 그 안에서 먹을 양식(인프라)은 없는 유럽의 기형적인 구조를 늦기 전에 뜯어고쳐야 한다는 경고인 셈이다. 


소냐 무지카로바 아틀랜틱카운슬 비상임 선임연구원 - 전 슬로바키아 외무부 차관, 전 유럽중앙은행 이코노미스트
소냐 무지카로바 아틀랜틱카운슬 비상임 선임연구원 - 전 슬로바키아 외무부 차관, 전 유럽중앙은행 이코노미스트

AI 분야에서 유럽이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외국 첨단 모델의 갑작스러운 등장이나 미국·중국 플랫폼의 시장 확산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AI의 정치·경제적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산업 기반 구축 역량, 컴퓨팅 인프라(데이터센터·반도체) 그리고 전략적 확장을 가능케 할 ‘진정한 단일 시장’이 유럽이 취약한 분야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결함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다. 미국의 정책 목표가 단순히 ‘중국 견제’를 넘어 ‘전 세계적 주도권 확보’로 선회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가 첨단 AI 칩에 부과한 25% 관세(미국의 기술 공급망 구축이나 반도체 파생 상품의 국내 제조 역량 강화에 기여하지 않을 경우 부과)는 고급 반도체 생산 투자를 미국 본토로 회귀시켜 미국 내 제조 경쟁력을 강화하고, 자체 AI 인프라 개발을 가속하려는 노골적인 의도를 표현한 셈이다. 

이는 수년간 이어져 온 광범위한 AI 전략의 결과물로, 기존의 세 가지 가정을 완전히 폐기한다. 미국이 산업 정책보다 시장 효율성을 우선시할 것이라는 착각이 첫째이고, 중국이 컴퓨팅 역량을 자체 구축하기보다 수입에 의존할 것이라는 판단이 둘째이며, 유럽이 자체적인 주권 역량 없이도 산업을 규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이 셋째다. 

미국은 이미 시장이 공급망을 최적화할 것이라는 믿음을 버렸다. 칩 설계부터 제조, 배포의 거점을 재편하기 위해 보조금, 세제 혜택, 조달 정책에 수출 통제까지 관련 정책을 겹겹이 쌓아 올리고 있다. 중국 역시 자체 ①‘AI 가속기’를 출시하고, 경제 외교에 AI 인프라를 연계하며 세를 불리고 있다. 반면 유럽은 AI를 사후적 과제로 취급해 법적 정의를 다듬는 데만 골몰해 왔다. 그사이 유럽의 외국 클라우드와 칩에 대한 외부 의존은 더욱 깊어졌다. 

과도한 규제와 산업 기반 부족 속에서 AI 시대에 진입한 유럽의 현실은 처참하다. 첨단 반도체 대부분을 수입하고, 미국보다 훨씬 비싼 산업용 전기 요금을 지불하며, 컴퓨팅 자원 상당수를 미국 클라우드 업체에 의존하고 있다. 동맹국의 주권 영토에 대해서 통제권을 행사하겠다는 미국의 위협이 노골화한 지금, 이런 의존은 외면할 수 없는 생존의 위협이 됐다. 

유럽은 현재 공격적인 수정주의 세력인 러시아와 산업·무역 관계를 언제든 무기화할 준비가 된 미국 정부 사이에 껴있다. 만약 미국이 첨단 컴퓨팅 접근권을 강압적으로 활용한다면, 유럽의 방어 네트워크와 금융시장, 의료 시스템은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즉각적인 마비에 맞닥뜨릴 것이다. 이는 곧 크렘린(러시아 대통령궁)에 유럽의 디지털 취약점을 파고들 ② 하이브리드 전쟁 기회를 제공하는 꼴이다. 

이제 유럽은 규제의 우월성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할 때다. 유럽 내 AI 산업에 필요한 물리적·재정적 인프라를 구축하지 못한다면 지금의 규제 역량은 자산이 아닌 부채가 될 것이다. 정책 입안자는 대규모 컴퓨팅 클러스터 구축을 지원하고, 저렴한 동시에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보장하며, 전략적 분야에 대한 지속적인 자본 지출을 약속해야 한다. 

문제는 속도다. 최첨단 데이터센터를 하나 짓는 데만 10억유로(약 1조7300억원) 이상 들고, 최신형 반도체 공장 구축에는 200억유로(약 34조6300억원)의 초기 투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유럽의 에너지 가격은 여전히 높고, 벤처캐피털 시장은 얕다. 또 클라우드 인프라는 이미 외국 업체가 장악했다. 최근 한 분석에 따르면, 유럽이 AI 산업을 업그레이드하려면 향후 5년간 3조유로(약 5194조원) 정도가 필요할 것으로 추정된다. 

다행인 건 유럽도 백지상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ASML은 최첨단 반도체 생산의 필수인 ③ EUV 노광 장비 시장을 독점하고 있으며, 이 장비는 TSMC와 삼성전자의 최첨단 반도체 생산 라인을 뒷받침한다. 또 광학 분야의 자이스(Zeiss)나 고출력 레이저 분야의 트럼프(Trumpf)도 AI 생산 체인에서 대체 불가능한 전략적 틈새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유럽연합(EU)이 글로벌 AI 하드웨어 스택의 주도권을 되찾아올 강력한 수단이다. 

다만 자본은 유럽이 AI 경쟁에서 가장 부족한 요소다. 연산 능력과 달리 자본은 정책 신호와 인센티브에 따라 신속히 이동할 수 있다. 유럽은 전반적인 기술과 AI 자금 조달에서 뒤처지고 있지만, 2019년부터 2024년 사이 미국보다 더 많은 첨단 기술 스타트업을 배출했다. 또 AI 특화 자금 조달은 성장하고 있다. 2024년 유럽 기업은 137건의 거래를 통해 약 30억유로(약 5조1900억원)를 조달했는데, 이는 전년 대비 35% 늘어난 수준이다. 유럽 방위·안보 기술에 대한 벤처캐피털 투자도 역대 최고 수준으로, 유럽 전략산업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이런 추세는 미국의 정책 불확실성에 대응하고, 유럽의 전략적 인프라와 산업 자산에 대한 장기 투자 비중을 확대하려는 것으로, 민간 자본이 점차 유럽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EU도 강경해져야 한다. 미국이 TSMC의 애리조나주 공장에 반도체 칩과 과학법(칩스법)을 적용한 것처럼, 유럽도 시장 지배력을 활용해 현지 연구개발(R&D)과 데이터센터 구축, 반도체 생산·패키징 등을 강제해야 한다. 또 공공 보증을 통해 연·기금과 보험사 자본이 반도체 공장 같은 장기적 인프라에 투입되도록 유도해야 한다. 

에너지·컴퓨팅·데이터센터를 별개 과제가 아닌, 하나의 단일 계획으로 통합 관리하는 것도 시급하다. 최근 미국의 정책 변화가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하드웨어와 자본 없이 규제만 휘두르는 국가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가장 먼저 희생될 뿐이라는 점이다. 유럽이 아직 기차에 올라탈 기회는 남아 있다. 다만, 그 기회는 규제를 실질적인 ‘힘’으로 뒷받침할 인프라를 구축할 때만 유효하다. 

프로젝트신디케이트

Tip|

① AI 가속기: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해야 하는 AI 학습과 추론에 최적화된 특수 반도체(NPU·GPU 등). 일반 중앙처리장치(CPU)보다 수백 배 빠른 속도로 AI 연산을 수행한다. AI의 두뇌와 같다. 


② 하이브리드 전쟁: 단순히 군대를 동원한 물리적 전투에 그치지 않고, 사이버 공격, 가짜 뉴스 유포, 경제적 압박, 심리전 등 비군사적 수단을 정규전과 혼합해 상대국을 무력화하는 현대적 전쟁 형태. 


③ EUV 노광 장비: 반도체 원판(웨이퍼)에 미세한 회로를 그리기 위해 극자외선을 사용하는 장비. 7㎚(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이하 초미세 공정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장비로, 네덜란드 ASML이 독점 생산 중이다.

소냐 무지카로바 아틀랜틱카운슬 비상임 선임연구원

정리=박진우 기자

정리=김주현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