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시나 미술관에서 감동을 찾는다면, 나는 잘 맞은 드라이버 샷의 비행에서 시를 발견한다(What other people may find in poetry or art museums, I find in the flight of a good drive).”
1950년대 후반, 미국 전역의 가정에 흑백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할 무렵, 혜성처럼 등장한 아놀드 파머(1929~2016)는 골프라는 스포츠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꾼 ‘혁명가’였다. 이전까지 골프가 빈틈없고 점잖은 귀족과 상류층의 사교 모임이었다면, 파머는 이를 땀 냄새 나는 격렬하고 대중적인 스포츠로 변모시켰다. 헐렁한 바지를 추켜올리며 꽁초가 될 때까지 피운 담배를 입에 물고, 온몸이 부서져라 클럽을 휘두르는 그의 ‘근육질 스윙’에 대중은 열광했다. 그가 샷을 날린 후 공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은 전쟁터의 장군을 연상케 했다. 팬은 그를 ‘킹(The King)’이라 불렀고, 그를 따라다니는 거대한 갤러리 군단은 ‘아니의 군대(Arnie’s Army)’라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그는 최초의 TV 스타 골퍼였고, 골프를 ‘보는 스포츠’로 만든 주인공이었다.
트랙터를 몰던 소년, 골프의 귀족주의를 깨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라트로브의 투박한 제철소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골프장 그린키퍼이자 프로였던 아버지의 등 너머로 골프를 배웠다. 어린 시절 무거운 철제 바퀴가 달린 트랙터를 몰며 코스 관리를 도왔던 경험은 훗날 그가 보여준 강력한 악력과 팔뚝 힘의 원천이 되었다.
엄격했던 아버지는 그에게 골프 기술보다 태도를 먼저 가르쳤다. “네가 얼마나 잘 치는지 말할 필요 없다. 그저 얼마나 잘 치는지 보여줘라(You don’t need to tell anybody how good you are. You show them how good you are).” 파머는 평생 이 가르침을 따라 거만하지 않으면서도, 압도적인 실력과 카리스마로 자신을 증명해 냈다.
파머의 골프 철학은 ‘고 포 브로크(Go for Broke·모 아니면 도)’ 정신으로 요약된다. 그는 핀이 구석에 꽂혀 있거나 해저드가 도사리고 있어도, 돌아가거나 끊어가는 안전한 길을 택하기보다 깃대를 직접 겨냥하는 과감한 승부를 즐겼다. 그의 공격 본능은 단순한 만용이 아닌 승리를 향한 갈망이었다.
“이기기 위해서는 대담하게 플레이해야 한다(You must play boldly to win).” “안전한 샷을 할 이유가 무엇인가? 어차피 실수하면 과감한 샷을 했을 때와 똑같이 곤경에 처한다(Why hit a conservative shot? When you miss it, you are in just as much trouble as when you miss a bold one).”
그의 이러한 스타일은 당시 정교함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던 기존 골프 문법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숲속에서 나무 사이 좁은 틈으로 공을 쳐 내거나, 워터 해저드를 가로질러 온 그린을 시도할 때마다 열광했다. 비록 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 더블 보기를 범할지라도, 파머는 결코 자신의 스타일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팬이 무엇을 원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았다. 파머의 공식 전기 작가 제임스 닷슨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를 신화 같은 미국적 기쁨으로 사랑했다. 그는 골프가 지닌 모든 아름다움을 대표했다. 우정, 동료애, 웃음, 골프라는 게임의 불가능성 그리고 어느 순간 찾아오는 황홀경. 평생 잊히지 않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이 파머였다. 그는 골프의 정의 그 자체였다.”
1960년 US오픈, 전설이 된 ‘모자 집어 던지기’
1960년 콜로라도주 덴버 인근 체리힐스 컨트리클럽에서 열린 US오픈은 그의 승부사 기질이 역사로 기록된 순간이었다. 마지막 라운드를 앞두고 선두 마이크 소차크에게 무려 7타나 뒤져 있던 상황. 1위와 격차가 너무 커서 모두가 파머의 우승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경기를 앞두고 클럽하우스에서 햄버거와 아이스티를 마시던 파머는 친한 스포츠기자 밥 드럼에게 “내가 65타를 치면 우승할 수 있을까?”라고 넌지시 물었다. 드럼은 코웃음을 치며 “꿈 깨게. 자네는 우승권에서 너무 멀어졌어. 소차크가 무너지지 않을 거야”라고 일축했다. 이 말에 자존심이 상한 파머는 얼굴을 붉히며 “내가 65타를 쳐서 280타를 만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똑똑히 봐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1번 홀(파4·346야드) 티잉 구역에 섰다. 덴버의 고지대 특성상 비거리가 더 나가는 것을 감안해도, 대부분 선수가 아이언으로 끊어가는 홀이었다. 파머 역시 앞선 3일 동안은 아이언 티샷을 했다. 하지만 분노와 투지로 가득 찬 파머는 드라이버를 꺼내 들었다. 이 대담한 ‘원온’은 대역전극의 서막이었다. 그는 첫 6개 홀에서 네 개의 버디를 잡아내며 맹추격했고, 결국 자신이 예고한 대로 65타를 기록하며 합계 4언더파 280타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경기가 끝난 후 그가 환호하며 모자를 하늘 높이 집어 던진 장면은 골프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세리머니 중 하나가 되었다. 당시 아마추어였던 ‘황금 곰’ 잭 니클라우스와 당대의 전설 벤 호건을 모두 제치고 이뤄낸 이 우승은 ‘파머의 시대’가 활짝 열렸음을 알리는 대관식이었다.
“소년 시절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
파머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를 몰랐다. “나는 절대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우승할 기회가 없다고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다(I never quit trying. I never felt that I didn't have a chance to win).” “확률이 당신에게 불리할 때조차 항상 총력을 다하라(Always make a total effort, even when the odds are against you).”
파머는 메이저 7승(마스터스 4회, US오픈 1회, 디오픈 2회)을 포함해 PGA투어 통산 62승을 거두며 골프의 황금기를 주도했다. 피니시 자세가 헬리콥터 프로펠러처럼 돌아가는 독특하고 거친 스윙 탓에 전문가로부터 “지나치게 힘으로만 친다” “오래가지 못할 스윙이다”라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공격적인 스타일을 끝까지 고수했다. 그에게 골프란 단순히 스코어를 줄이는 게임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대로 싸우는 전장이었기 때문이다.
“비평가가 여기저기서 더 안전한 샷을 했다면 몇 번 더 우승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건 아마 맞을 것이다. 하지만 투온을 노리는 것, 그것이 소년 시절의 나였고, 어른이 된 지금의 나다(Critics who have said a safer shot here or there would undoubtedly have won me a few more tournaments are probably correct. Going for the green in two was who I was as a boy - and it's who I remain as a 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