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택 화백의 ‘겹회화’를 입은 토마시의 아마로네 델라 발폴리첼라 클라시코. /금양인터내셔날
장승택 화백의 ‘겹회화’를 입은 토마시의 아마로네 델라 발폴리첼라 클라시코. /금양인터내셔날

한류(韓流)가 전 세계 문화 지형을 재편하고 있는 요즘, K-팝과 K-드라마를 넘어 K-아트에 대한 관심도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이 흐름은 이제 와인 업계에도 도달했다. 유서 깊은 와이너리가 한국 예술가의 작품을 통해 자기 정체성과 철학을 표현하는 사례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와인의 명가 토마시(Tommasi)는 최근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장승택 화백의 작품으로 레이블과 패키지를 장식해 눈길을 끌고 있다. 우리 예술을 두른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즐기는 차원을 넘어 한국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감각적 만족을 동시에 경험하는 일이다. 장 화백의 작품을 입은 아름다운 와인, 토마시의 아마로네 델라 발폴리첼라 클라시코(Amarone della Valpolicella Classico)를 만나 보자.

시간의 축적이 탄생시킨 아마로네

장 화백의 대표작은 여러 번의 붓질로 색을 칠하고 말리고 덧입히며 완성한 ‘겹회화(Layered Painting)’ 시리즈다. 미묘하게 다른 색이 수많은 층을 이룬 그의 작품을 마주하면 축적된 시간의 밀도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을 받는다. 장 화백의 이런 예술 세계는 토마시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아마로네 델라 발폴리첼라는 이탈리아 북동부 발폴리첼라 지역에서 포도를 말려 와인을 양조하는 아파시멘토(Appassimento) 방식으로 만든다. 장 화백이 오랜 시간에 걸쳐 색을 한 층 한 층 쌓아 올리듯, 아마로네도 100일간의 포도 건조, 느린 발효, 장기 숙성이라는 긴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상당한 인내와 정교함을 요하는 이 작업의 기원은 놀랍게도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시대부터 발폴리첼라에서는 수확한 포도를 볏짚 위에서 말리는 전통이 있었다. 포도가 마르면 수분이 줄고 향과 당분이 농축되기 때문이다. 이런 포도로 만든 즙은 당도가 높아 발효가 무척 느리게 진행되는데, 모든 당분이 알코올로 변하기 전에 발효를 멈추면 레치오토(Recioto)라는 달콤한 와인이 탄생한다. 이 와인은 오랫동안 왕실과 귀족 등으로부터 귀한 디저트 와인으로 사랑받았다. 그렇다면 왜 이 방식이 지금은 드라이한 아마로네 와인을 만드는 데 쓰이게 된 걸까.

20세기 초 발폴리첼라의 한 와이너리에서 레치오토를 양조하던 중 배럴 하나를 실수로 방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결과 의도치 않게 발효가 끝까지 진행돼 알코올 도수가 높고 단맛이 느껴지지 않는 와인이 만들어졌고, 이를 맛본 와인 메이커가 ‘아마로(amaro·쓰다)’라고 외친 것이 계기가 되어 아마로네라는 이름이 붙었다. 제1·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경제가 회복되자 유럽에서는 미식 문화가 확산하며 아마로네의 드라이하고 농축된 스타일이 차츰 개성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때부터 아마로네는 레치오토보다 더 널리 생산되기 시작했고 발폴리첼라를 대표하는 명품 와인으로 자리 잡았다.

피에란젤로 토마시 토마시 CEO. /토마시
피에란젤로 토마시 토마시 CEO. /토마시

한국인의 미각과 공명하는 토마시

토마시는 장 화백의 작품 중에서도 레드 와인을 연상시키는 자줏빛 작품을 선택해 패키지를 만들고 레이블도 같은 톤으로 바꿨다. 1902년 와이너리 설립 이후 작가와 협업을 이유로 레이블 색을 변경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토마시의 4세대 경영인 피에란젤로 토마시(Pierangelo Tommasi) 최고경영자(CEO)는 “아마로네의 긴 양조 과정이 시간의 예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겹회화’와 닮았다. 금번 협업이 이탈리아 와인과 한국 예술을 잇는 정서적·문화적 연결 고리가 되길 바란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한국은 토마시 와인이 매출 1위를 기록할 정도로 팬층이 두껍다. 비결이 뭘까. 토마시 CEO는 장인 정신을 첫 번째 이유로 꼽았다. 토마시는 4대째 내려오는 가족 경영 와이너리다. 오너 일가가 경영에만 일부 참여하는 여타 와이너리와 달리 이곳에서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 등 각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세대를 이어온 전통과 책임감이 남다른 품질의 탄탄한 기초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토마시는 포도를 매입하지 않고 모두 직접 재배한다. 포도를 말릴 때도 플라스틱 상자와 팬을 이용한 인공 바람 대신 아렐레(Arele)라는 전통 대나무 매트와 알프스에서 불어오는 자연풍을 활용한다. 100일 이상의 건조 기간을 엄수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때 매일 상태를 점검해 상하거나 곰팡이가 핀 것은 즉시 제거한다. 포도를 지나치게 말리는 것도 피한다. 산미, 아로마, 구조감의 균형이 살아 있는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다. 숙성할 때도 나무 향이 와인의 풍미를 압도하지 않도록 대형 오크통을 사용한다. 그 결과, 토마시의 아마로네에서는 경쾌한 보디감이 풍부한 복합미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검은 베리류, 말린 허브, 다채로운 향신료 등의 신선한 아로마가 우아하게 펼쳐진다.

토마시가 인기 있는 또 다른 이유로 토마시 CEO가 꼽은 것은 한국 음식과 어울림이었다. 그는 “포도를 건조하는 과정이 우거지, 고사리, 고추 등을 말리는 것과 유사하고, 긴 발효와 숙성이 간장, 된장, 김치 같은 발효 음식과 결을 같이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일까. 토마시 아마로네의 감미로운 맛과 은은한 향신료 향은 고추장이나 참기름을 곁들인 우리 음식과 무척 잘 어울린다.

토마시 CEO는 “장 화백의 작품을 통해 토마시의 와인 철학이 한국 소비자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길 바란다. 토마시는 한국의 식문화와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싶다”라고 말하며, 금번 협업이 한국과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했다. K-아트를 두른 토마시 아마로네를 열어 천천히 따르면 이탈리아의 시간과 한국의 감성이 겹겹이 잔 속을 채운다. 와인과 예술이 만난 이 아름다운 세계는 잔을 기울이는 순간 완성된다. 

토마시의 대형 오크통에서  와인을 추출하고 있다. /토마시
토마시의 대형 오크통에서 와인을 추출하고 있다. /토마시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