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더 좋은 말보다는 더 따뜻한 것을 찾는다. 설명보다 온기를, 해답보다 시간을 찾는다. 한방차는 그 모든 것을 말없이 제공한다. /퍼플렉시티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더 좋은 말보다는 더 따뜻한 것을 찾는다. 설명보다 온기를, 해답보다 시간을 찾는다. 한방차는 그 모든 것을 말없이 제공한다. /퍼플렉시티

대학 시절, 친구들이 커피를 마실 때 나는 주로 차(茶)를 찾았다. 개인적인 체질상 진한 커피를 마시면 속이 쓰리다. 카페인이 위벽을 긁어내는 듯한 느낌, 심장박동이 불필요하게 빨라지는 감각. 반면 전통차는 그런 일이 없다. 몸이 편안해지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대학 캠퍼스 혹은 인사동 뒷골목 낡은 찻집의 이층 다락방 등이 내 아지트였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 사장님이 직접 끓여주던 쌍화차, 생강차, 유자차, 녹차 등과 함께 나온 한과의 기억이 아스라하다. 그곳에서 나는 시험공부를 했고, 졸업 후의 진로를 고민했다.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열띤 토론을 하며 시대의 아픔을 공감한 곳도, 실연의 아픔을 달랜 곳도 그곳이었다.

어느 날, 그 찻집이 모던한 커피숍으로 바뀌었다. 간판은 영문으로, 낡은 목재 의자는 철제 스툴이 됐고, 도기로 된 투박한 찻잔은 자기로 된 날렵한 잔으로 대체됐다. 당혹감보다 상실감이 먼저 왔다. 단순히 하나의 공간이 아니라, 내 안의 어떤 시간을 잃어버린 느낌. 그 찻집은 내게 참 좋은 안식처였다. 느려도 좋고, 생산적이지 않아도 괜찮으며, 그저 따뜻한 것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만 있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던 곳이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차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나를 지켜주던 작은 의식이었다는 것을.

김진국 - 문화평론가, 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김진국 - 문화평론가, 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한방차인 쌍화차를 마실 때면 늘 같은 기억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독감에 걸려 시름시름 앓고 있을 때, 엄마가 끓여주던 탕약 냄새가 지금도 생생하다. 당귀와 황기가 뭉클하게 섞인, 달콤하면서도 쓴 그 향. 잠결에 눈을 뜨면 엄마는 부엌에서 연탄불 위에 놓인 약탕기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뒷모습만으로도 벌써 치유가 된 것 같았다. 지금 마시는 쌍화차에도 그때와 비슷한 향이 남아 있다. 계피와 생강, 대추가 어우러진 단맛. 치료제라기보다는 누군가가 나를 잊지 않고 있다는 증거와 같은 맛이다.

 

기도·명상과 닮은 차 마시는 일

한방에서 쌍화탕은 과로와 병후 허약을 위한 처방이다. 당귀, 숙지황 같은 보혈 약과 황기 같은 보기 약으로 기운을 끌어올린다. 그러나 일상에서 마시는 쌍화차는 훨씬 가볍다. 무거운 약재를 덜어내고 대추, 계피, 생강, 감초로 몸을 데운다. 치료라기보다 예방이고, 처방이라기보다 배려에 가깝다.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스스로에게 보내는 작은 신호이기도 하다. ‘지금은 좀 쉬어도 괜찮다’는 시그널이다.

사람이 극도로 지치거나 불안할 때 우리 뇌는 언어의 영역에 있지 않다. 설명과 논리는 이성의 일이지만, 고통의 순간에 주도권을 쥐는 것은 더 원초적인 감각이다. 이때 말은 너무 늦다. ‘조언은 공격처럼 들리고, 위로는 평가처럼 느껴진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그러나 차는 다르다. 따뜻한 액체가 식도를 따라 내려가고, 삼킴의 리듬이 생긴다. 향이 코와 마음을 잇는 통로를 조용히 연다. 이 모든 과정은 생각을 거치지 않는다. 몸이 먼저 안다. 지금은 안전해도 되는 순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차를 마시는 일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를 당장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로 돌아가는 일종의 의식(ritual)이다. 그래서 차는 기도 혹은 명상과 닮았다. 셋 모두 결론을 요구하지 않고 성과를 묻지 않는다. 지금의 상태를 고쳐야 한다고 다그치지 않는다. 그저 여기 있어도 된다는 자리를 만든다. 물이 끓는 시간, 향이 퍼지는 시간, 식기까지의 시간. 이 느린 리듬 속에서 자율신경계는 자연스럽게 진정되고, 마음은 조금씩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중년에게는 무언의 애도 의식

중년이 되면 이 허락은 더욱 절실해진다. 중년은 책임의 중심에 서 있지만, 위로의 중심에서는 자주 비켜난다. 돌봄은 아래로 흐르고, 기대는 위에서 내려온다. 자신을 위해 속도를 늦추는 일에는 늘 이유와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차 한 잔은 허락된다. 차 좀 마시고 온다는 말은 쉬어도 된다는 사회적 합의처럼 작동한다. 그래서 차는 중년에게 허락된 가장 온화한 무위(無爲)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쌍화차는 중년의 심리에 잘 맞는다. 중년은 늘 자신에게 강하다. 책임의 무게를 알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그 단단함 때문에 자신이 소진되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쌍화차는 ‘아직 병은 아니지만, 이미 피곤한 상태’를 정확히 겨냥한다. 이 애매한 경계야말로 중년의 삶이 서 있는 자리다.

몇 년 전, 아버지가 쓰러져 입원했을 때 나는 매일 병원 앞 약국에서 쌍화차를 사서 마셨다. 종이컵에 담긴, 자판기에서 나온 쌍화차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병실 복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뜨거운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는 몇 분이 주어졌다. 아버지 병이 낫기를, 시간이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저 이 순간을 버텨내고 이겨낼 최소한의 온기가 필요했다. 차는 그렇게 나를 붙들어 주었다.

중년의 슬픔은 대개 말이 없다. 젊음의 상실, 가능성의 축소, 부모의 죽음, 자녀와의 거리⋯. 이 모든 것은 한 문장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울기도 애매하고, 붙잡고 애도하기에는 삶이 너무 바쁘다. 차는 이 애도를 폭발시키지 않고 스며들게 한다. 울지 않아도 되고,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뜨거웠던 것이 식어가는 시간을 바라볼 수 있으면 충분하다. 그래서 차는 중년에게는 무언의 애도 의식이기도 하다.

 

몸과 마음, 말과 침묵, 사람과 사람 사이 긴장 풀어줘

차에는 또 다른 힘이 있다. 기억을 불러오는 힘이다. 찻집 난로 위에서 끓던 주전자의 수증기, 겨울밤 부엌에서 나던 생강과 계피 향, 누군가를 위해 불 앞에 서 있던 시간의 기억. 이런 감각적 기억은 언어보다 깊은 층위에서 마음을 안정시킨다. 쌍화차를 마실 때 떠오르는 것은 성분이나 효능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돌봐주던 순간이다. 그 기억이 지금의 나를 돌본다.

사람들이 힘든 이에게 해답 대신 차를 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차를 권하는 순간 우리는 말한다. 당신을 고칠 생각은 없다고, 지금 상태 그대로 함께 있어도 괜찮다고, 당장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차는 상대의 속도를 존중한다. 특히 쌍화차처럼 이름 자체에 ‘서로 화합한다’ ‘서로 조화롭게 한다’는 뜻을 담은 차는, 관계 회복의 상징이 된다. 몸과 마음, 말과 침묵,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긴장을 부드럽게 풀어준다. 기혈과 음양의 조화라는 애초의 목적도 이와 같은 취지였을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무언가를 마실 때조차 효과를 묻는다. 얼마나 빨리 좋아지는지, 얼마나 확실한지를. 그러나 차는 한 번도 그 질문에 답한 적이 없다. 차는 늘 같은 태도를 유지한다. 어쩌면 우리가 차를 마시는 이유는 건강 때문이 아니라, 아무 증명도 요구하지 않는 존재와 잠시라도 함께 있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차 기다리는 시간에 조용한 회복 일어나

쌍화차를 마신다고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차는 문제를 다루기 전에 필요한 상태를 만든다. 버틸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상태. 회복은 언제나 그런 상태에서 시작된다. 기도가 그렇고 명상이 그렇듯, 차 역시 말한다. 지금 이 상태로도 여기 있어도 괜찮다고. 그 말은 귀로 들리지 않지만 우리의 몸은 정확히 알아듣는다. 어깨가 조금 내려가고, 숨이 길어지며, 생각이 잠시 쉬어 간다.

나는 지금 종로5가 쌍화차 골목의 한 전통찻집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해 질 무렵, 하루의 소음이 조금씩 가라앉을 때 김이 오르는 찻주전자를 바라본다. 따뜻한 온기가 향을 따라 내 안면 근육을 다독인다. 후각을 평안하게 한다. 이 쌍화차 한 잔은 스스로에게 건네는 작은 의식이다. 오늘 하루를 여기까지 살아낸 자신에게 더 이상 다그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더 좋은 말보다는 더 따뜻한 것을 찾는다. 설명보다 온기를, 해답보다 시간을 찾는다. 한방차는 그 모든 것을 말없이 제공한다. 오늘도 누군가는 물을 올리고, 불을 줄이고, 김이 오르기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 속에서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한 회복이 조용히 시작된다. 말보다 먼저 건네지는 그 따뜻함처럼 말이다. 

김진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