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표된 한국과 중국 간 제조업 경쟁력 보고서가 충격을 던지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한국, 중국, 일본, 미국, 유럽연합(EU)의 50개 핵심 국가 전략 기술 수준을 비교 분석한 ‘2024년도 기술 수준 평가 결과안’을 2월 22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미국을 100%로 놓으면 한국은 중국(91.3%), EU(90.5%), 일본(84.9%)에 뒤처진 82.7%로, 다섯 나라와 지역 중 최하위였다. 우리의 최대 제조업 경쟁국인 중국은 2023년 3위에서 2024년 2위로 한 계단 상승하면서 한중 간 격차는 4.8%포인트에서 8.6%포인트로 2년 새 격차가 더 벌어졌다. 정부가 ‘기술 안보’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관리하고 투자하는 핵심 기술의 주도권을 최대 경쟁국인 중국에 넘겨준 것이다.
한국 제조업의 위기 시그널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은 특정 산업의 우열을 가리는 경쟁의 단계를 넘어섰다. 이는 21세기 세계 질서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거대한 흐름이며, 그 파고의 중심에 선 한국 제조업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한국의 대중 무역은 이미 2023년부터 적자 시대로 접어들었다. 문제는 단순히 대중 무역 적자로 접어든 교역 구조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한중 교역의 우위를 역전시킬 기회 자체가 구조적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절박한 신호가 담겨 있다.
과거 우리가 견지해 온 ‘초격차 전략’은 한국이 독보적인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강력한 자신감에 기반을 두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격차를 유지하거나 방어할 시간적 여유가 급격히 소진되는 형국이다. 산업 현장에서는 중국을 더 이상 뒤를 쫓아오는 ‘추격자’가 아니라, 우리와 대등하게 겨루는 ‘경쟁자’ 혹은 이미 시장의 규칙을 만드는 ‘선도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번 조사는 단순한 점유율 하락이 아니라, 글로벌 산업의 주도권 자체가 한국에서 중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거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경고하고 있다.
‘기술 우열’에서 ‘생태계 완성’으로
우리가 미래 먹거리로 확신하며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믿었던 D램, 이차전지, 전기차 그리고 초고압직류송전(HVDC) 설비 같은 첨단 분야에서도 중국의 성장 속도는 한국을 압도하고 있다. 우리 수출의 보루인 D램 분야에서 중국의 기술 개발 속도가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중국은 단일 기술뿐만 아니라 기술을 둘러싼 ‘생태계의 완성도’에서 앞서고 있다. 중국의 급속한 부상은 우연이 아닌 치밀하게 설계된 구조적 요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무엇보다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 전략산업에 자본을 집중하는 강력한 산업 정책이 그 바탕에 있다. 여기에 14억 인구의 초대형 내수 시장을 단순한 소비처가 아닌, 기술을 빠르게 검증하고 보완하는 ‘실증 무대’로 활용하는 전략이 결합했다. 또한 리튬과 희토류 등 핵심 자원의 공급망을 장악함으로써 확보한 원가 경쟁력은 중국 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는 토대가 됐다. 반면 기업 중심의 시장 경쟁 모델에 의존해 온 한국은 이러한 거대 국가자본주의 시스템의 공세 앞에 생태계 구축 속도에서 열세에 놓이게 된 것이다.
중국 ‘저가 공세’ 넘어 ‘속도 경제’로
과거 중국 산업을 상징하던 단어가 값싼 노동력을 앞세운 ‘저가 공세’였다면, 오늘날 중국은 가격과 속도, 규모 그리고 국가의 동원 능력이 유기적으로 결합한 고도화된 기술 체계로 진화했다. 특히 ‘학습 속도 경제’는 이제 중국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됐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일단 시장에 투입해 방대한 데이터를 축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성능을 개선해 나가는 중국의 방식은 전기차와 배터리 산업에서 그 파괴력을 입증했다. 대량 보급을 통해 원가를 극단적으로 낮추고 소프트웨어를 고도화한 뒤 다시 글로벌 시장을 장악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든 것이다. 특히 중국 정부는 실패한 기술도 중요한 전략적 자산으로 간주하며 국가 전체가 기술 발전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이는 보조금 지급이라는 단편적 지원을 넘어 광물 확보부터 최종 제품의 재활용까지 전 과정을 수직 계열화하는 체계적 산업 설계의 결과다. 개별 기업이 각자 도생하는 구조로는 이러한 거대한 수직적 결합 체제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 물론 중국식 모델 역시 과잉투자에 따른 부채 문제나 지정학적 신뢰 리스크라는 아킬레스건을 안고 있다. 하지만 노광 장비 같은 원천 기술의 한계를 제외하면 중국은 이미 ‘속도의 경제’를 통해 글로벌 산업 지도를 다시 쓰고 있다. 우리가 파고들 지점은 가격이 아닌, 중국이 도달하기 힘든 높은 수준의 ‘품질과 신뢰의 경제’여야 한다.
한국의 산업 정책과 정부 역할 재정립 절실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공세가 전방위적으로 휘몰아치는 상황에서 기업 개별의 혁신만으로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제 정부의 역할은 공정한 심판인 ‘경기 관리자’ 를 넘어, 우리 기업이 글로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전략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적극적인 행위자로 재정립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세액공제 같은 간접적인 지원 방식만으로는 직접 현금을 투입하며 속도전을 펼치는 중국의 공세를 막아내기에 역부족이다.
우선 미국이나 유럽처럼 설비투자액의 일정 비율을 즉시 현금으로 되돌려주는 ‘직접 보조금 시스템’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 투자가 결정되는 순간 자금이 즉각적으로 흐르는 구조가 마련되어야만 중국과 속도 경쟁에서 밀리지 않고 적기에 설비를 확장할 수 있다. 또한 핵심 원자재 확보는 이제 민간 기업의 상업적 판단에만 맡길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정부가 전면에 나서 호주, 인도네시아 등 주요 자원국과 국가 간 장기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원가 변동성을 낮추고, 90%에 육박하는 대중국 자원 의존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초격차 기술’과 ‘생태계 록인’이 살길
정부의 전폭적인 인프라 지원이 뒷받침된다면, 기업은 중국이 물리적 규모로도 쉽게 넘볼 수 없는 차별화된 초격차 전략을 전개해야 한다. 범용 제품 시장에서의 가격 경쟁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 대신 HBM4 같은 차세대 고부가가치 메모리, 전고체 배터리, 고부가가치 선박 등 중국이 5년 안에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공정 노하우와 특허 장벽이 필요한 영역에 모든 자원을 올인해야 한다. 단순한 하드웨어 제조 역량을 넘어 기술 사다리의 최상단을 선점하는 것만이 생존의 유일한 길이다. 또한 하드웨어의 우위를 넘어 소프트웨어와 표준을 선점해 고객을 우리 생태계에 묶어두는 ‘록인(lock-in·잠금 효과)’ 전략이 필요하다. 전기차 통신 프로토콜, 배터리 재사용 표준 등 미래 산업의 규칙을 우리가 주도함으로써 글로벌 시장에서 우위를 공고히 해야 한다. 미·중 갈등으로 인해 기술 생태계가 분리되는 작금의 상황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과 기술 동맹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들 시장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첨단 기술 공급자’라는 확고한 브랜드를 각인시킨다면 중국의 공세 속에서도 독자적인 지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골든타임 3년
우리에게 남은 골든타임은 그리 길지 않다. 업종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전체적으로 보아 3~5년 정도가 우리 앞에 놓인 마지막 기회다. 현재 고부가가치 반도체나 일부 전력 인프라에서 누리고 있는 질적 우위는 결코 영구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미국의 대중국 견제로 인해 중국 기업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얻은 반사이익의 성격도 크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가 시장을 주도했던 액정표시장치(LCD)와 가전산업이 어떻게 중국의 규모에 밀려 재편되었는지를 떠올린다면, 지금의 상황을 결코 낙관할 수 없다.
이 시기를 놓치면 우리가 쌓아온 ‘품질 프리미엄’과 ‘브랜드 후광’ 효과는 급격히 희석될 것이다. 지금은 위기를 관리하며 현상을 유지할 때가 아니라, 산업 전략 전체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할 시점이다. 점진적인 개선만으로는 중국의 막대한 규모와 전광석화 같은 속도를 이길 수 없다. 파괴적 혁신과 특단의 정책 지원이 유기적으로 결합해 ‘격차의 재창출’을 이루어내야 한다. 만약 이 마지막 보루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한국 제조업은 프리미엄 시장에서도 가격 경쟁에 내몰리며 구조적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국가와 기업 그리고 국민이 모두 이 거대한 기술 전쟁의 엄중함을 인식하고 사즉생의 각오로 총력 대응에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