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동설 도구 활용해 지동설 근거 찾아
시편 구절 남겨 독실한 신앙심 보여
미국 작가 댄 브라운은 2003년 ‘다빈치 코드’를 발표했다. 르네상스 예술가이자 과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속에 숨겨진 암호를 통해 예수의 성배(聖杯)에 얽힌 비밀을 추적하는 내용을 담은 추리 소설이다.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물론이고 할리우드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져 큰 인기를 얻었다.
소설처럼 수백 년 된 고전(古典)에서 과학사의 최대 사건을 추적할 단서인 ‘갈릴레이 코드’가 발견됐다. 이탈리아 과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1400년 동안 이어진 지구 중심의 우주론을 태양 중심 우주론으로 바꾼 인물이다. 그는 지구 중심설을 담은 그리스 천문학자의 고전 여백에 자기 생각을 담은 주석을 남긴 것으로 확인됐다. 갈릴레이 코드는 앞으로 우주론 전환기의 지적 논쟁을 구체화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천동설 고전에서 나온 갈릴레이 필적
이탈리아 밀라노대 철학과의 박사후연구원인 이반 말라라 박사는 “이탈리아 피렌체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알마게스트’ 1551년 인쇄본에서 갈릴레이의 필체로 추정되는 주석을 발견했다”고 2월 18일(현지시각) 이탈리아 신문 일 솔레 24 오레(Il Sole 24 Ore)에 발표했다.
알마게스트는 2세기 그리스의 천문학자인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가 지구 중심설을 집대성한 저서다. 그는 이 책에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고정돼 있고, 태양과 달, 행성이 그 주위를 공전한다고 설명했다. 바로 천동설이다.
지구 중심 우주론은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하는 지동설을 주장하기 전까지 기독교 세계관과 결합해 1400년간 철학과 과학을 지배했다.
말라라 박사는 지난 1월 도서관에서 알마게스트의 책장을 넘기던 중 어색한 부분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누군가 책 여백에 주석을 써놓았는데, 놀랍게도 갈릴레이의 필체와 흡사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한 갈릴레이가 반대편 학자에게 가장 권위 있는 책에 남긴 글을 찾았으니, 과학사에서 엄청난 발견일 수밖에 없었다.
말라라 박사는 대발견에 대한 흥분으로 잠 못 이루다가 다음 날 새벽 3시에 이탈리아의 갈릴레이 학자 두 명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그의 기대대로 갈릴레이의 주석이 확실하다는 답이 왔다. 그날 말라라 박사의 메일을 받았던 이탈리아 칼리아리대 철학과의 미켈레 카메로타 교수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여백 주석이 갈릴레이의 것임을 완전히 확신한다”고 밝혔다.
정치적 도발보다 존경심 담아 문제 제기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공공연히 주장해 1633년 교황청 종교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9년간 가택 연금을 당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갈릴레이를 독단적인 교회에 맞선 정치적 개혁가의 모습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말라라 박사는 이번에 발견한 주석을 근거로 갈릴레이가 프톨레마이오스를 깊이 이해한 것이 오히려 우주론적 반란의 토대가 됐다고 추측했다.
천동설은 고대 그리스 학문의 최고봉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집대성했다. 그는 우주의 중심에 구형 지구를 두고 태양을 비롯해 다른 천체가 각각 투명한 회전구에서 본성상 가장 완전한 운동인 원운동을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천동설은 행성이 지구를 향해 일시적으로 거꾸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역행 운동’을 설명하지 못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천체 관측을 통해 이런 문제를 인지하고 해결책을 찾았다. 행성이 작은 원(주전원)을 그리며 회전하면서 지구 주변의 큰 원(이심원)을 따라 돈다는 복잡한 이론으로 설명했다. 갈릴레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설명을 숙지한 후 이 문제를 지동설로 해결했다. 행성의 역행은 지구가 더 빠른 속도로 태양을 공전하며 해당 행성을 추월할 때 발생하는 겉보기 운동, 즉 착시란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빠른 차가 느린 차를 추월할 때 느린 차가 뒤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갈릴레이 코드는 이를 입증한다. 알마게스트 1권 3장의 여백에 적힌 주석은 갈릴레이가 1590년 발표한 책인 ‘운동에 관하여’에서쓴 표현과 흡사했다. 고유명사 표기나 밑줄 긋는 방식도 갈릴레이와 같았다. 상대를 무지한 존재로 깔아뭉개기부터 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의 주장을 숙지한 후에 자기 생각을 신중하게 설명한 것이다. 고대 천문학자를 깍듯이 예우하는 학문적 후배의 모습을 보였다고 볼 수 있다.
주석에서 독실한 신앙인 모습도 드러나
1543년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주창한 책인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발간했다. 이번에 발견된 주석은 갈릴레이가 그 책을 보고 나서 어떻게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에서 벗어났는지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갈릴레이가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읽고 바로 지동설로 견해를 바꿨다기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따라가며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하는 방법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갈릴레이는 이론적으로 천동설을 반박하고 나서 지동설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를 금성 관측에서 찾았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따르면, 금성은 초승달로만 보여야 하는데, 실제 관측에서는 초승달, 반달, 보름달 형태로 계속 변하고 모양에 따라 겉보기 크기도 달라졌다. 이는 금성이 지구와 마찬가지로 태양을 공전해야 가능한 현상이었다(위 그래픽 참고).
갈릴레이의 종교적 관점을 보여주는 단서도 나왔다. 흥미롭게도 갈릴레이는 알마게스트 여백에 구약성경에 나오는 시편 145편도 남겼다. 이는 갈릴레이가 종교 권위를 무시했다는 오늘날 고정관념과 달리 과학 연구에서도 독실한 신앙심을 유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말라라 박사는 16세기에 나온 다른 알마게스트 인쇄본에서 익명의 저자가 “갈릴레이는 프톨레마이오스를 연구하기 전 하느님께 기도 드렸다”고 쓴 주석도 발견했다. 이탈리아 수학자인 알레산드로 마르케티도 1673년에 쓴 편지에서 갈릴레이가 알마게스트를 펼칠 때마다 기도했다고 전했다. 말라라 박사는 갈릴레이 코드 분석 결과를 국제 학술지 ‘천문학사 저널’에 발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