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화려하게 출발한 기업이 오히려 더 극적으로 무너질 때가 있다. 시장의 판도를 바꿀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투자자의 자금이 몰리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까지 받는 등 화려하게 등장했으나 결과는 정반대다. 모바일 숏폼 콘텐츠 플랫폼 ‘퀴비(Quibi)’ 와 프리미엄 주스 스타트업 ‘주세로(Juicero)’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두 기업은 모두 시장의 큰 기대를 받았지만, 끝내 고객의 선택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왜 시장에서 이들은 살아남지 못했을까.
‘해봐서 다 안다’는 과신
2020년 4월 미디어 업계의 관심을 한 몸에 모은 신생 플랫폼이 있었다. 드림웍스의 공동 창립자이자, 디즈니 스튜디오 전 회장인 제프리 캐천버그와 휴렛팩커드(HP)의 전 최고경영자(CEO) 멕 휘트먼이 손잡고 만든 숏폼 플랫폼 퀴비였다. 퀴비는 ‘퀵 바이트(quick bite)’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10분 안팎의 짧은 동영상을 제공하는 서비스다.
퀴비가 내세운 방향은 분명했다. 스마트폰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잠깐의 자투리 시간에도 완성도가 높은 ‘프리미엄 콘텐츠’를 즐길 수 있게 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기예르모 델 토로 등 할리우드의 거장 감독이 콘텐츠 제작에 참여했다. 여기에 스마트폰 화면을 세로로 보든 가로로 보든 영상이 자연스럽게 전환하는 ‘턴 스타일’ 기술을 다른 숏폼 플랫폼과의 차별점으로 내세웠다. 출시 전부터 구글, P&G 등 글로벌 기업과 광고 계약을 맺었고, 투자금은 17억5000만달러(약 2조6300억원)에 달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성공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퀴비가 서비스를 개시한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이 사람의 일상을 크게 바꿔 놓았다. 출퇴근과 이동 중 자투리 시간을 겨냥했으나, 정작 그 이동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물론 실패의 원인을 이것만으로 설명할 순 없다. 퀴비는 사람들이 왜 짧은 영상을 보는지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았다. 숏폼 사용자는 보통 짧은 영상을 가볍게 쓱 보고, 재미가 있으면 그 영상에 하트(좋아요)를 누르고, 재미가 없으면 다음 영상으로 넘기는 그런 경험을 추구한다. 퀴비는 영화나 드라마의 서사를 잘게 나눈 콘텐츠를 주로 다뤘는데, 앞뒤 맥락을 알아야 이해되는 콘텐츠를 짧게 잘라 놓았다고 사람들이 열광하는 짧은 영상이 되는 건 아니었다. 퀴비는 또 초기 서비스 당시 화면 캡처와 공유도 제한했다. 짧은 영상이 공유를 통해 확산하는 소비 흐름을 타지 못한 것이다. 결국 퀴비는 출시 6개월 만에 서비스 종료를 발표했다.
퀴비의 실패는 시장보다 자신의 판단을 더 믿은 리더의 태도에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 퀴비의 창업자 캐천버그와 전 HP CEO 휘트먼 모두 화려한 경력의 인물이지만, 이런 성공 경험은 때로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는 과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용자의 시청 습관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무엇에 반응하며, 무엇을 불편해하는지를 충분히 검증하기보다,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있다. 휘트먼은 서비스 출시를 앞두고 ‘출시는 단 한 번뿐이며, 모든 것은 완벽해야 한다’는 태도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용자 반응을 본 뒤 빠르게 수정하는 전략이 아닌, 처음부터 완성된 답으로 시장에 나가려 했던 셈이다.
‘기술 있는데, 쓸모없었습니다’ 빗나간 혁신
2010년 중반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기술이 일상의 불편을 바꾼다는 기대가 컸고, 주세로는 그 기대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주세로는 스마트 주스 머신과 전용 과채팩 정기 배송 모델을 결합, 집에서도 손쉽게 신선한 프리미엄 주스를 즐긴다는 구상을 내세운 기업이다. 구글 벤처스와 클라이너 퍼킨스 등 유명 투자 기업이 주세로에 자금을 댔다. 유치 투자금은 약 1억2000만달러(약 1810억원) 규모였다.
그러나 주세로가 내놓은 혁신은 고객 관점에서는 다소 생소한 모습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QR 코드인데, 주세로는 전용 파우치에 QR 코드를 부착하고 주스 기기가 이를 인식해야만 작동하도록 했다. 주세로는 이를 유통기한이 지난 제품의 섭취를 막는 안전장치라고 설명했으나, 소비자가 보기에 유통기한은 이미 팩에 인쇄돼 있었고, QR 코드로 주스 머신이 이를 확인하고 통제할 이유가 없었다. 기술을 더했지만, 그 기술이 소비자에게 꼭 필요한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였다.
주세로의 빗나간 혁신은 블룸버그 보도로 드러났다. 기자가 전용 과채팩을 주스 머신에 넣지 않고, 손으로 짰는데, 머신으로 착즙한 것과 거의 같은 양의 주스를 추출한 것이다. 자동차 두 대를 들어 올리는 힘으로 팩을 압착하도록 주스 머신을 설계하고, 항공기 사용 등급의 알루미늄까지 사용한 고가의 주스 머신이 소비자에게는 사실상 불필요한 물건이 된 순간이었다. “손으로도 짤 수 있는데, 이걸 699달러(주스 머신 가격)에 판다고? 너무 비싼 거 아니야?”라는 반응이 나왔다.
결국 주세로는 제품 판매 1년 남짓 만에 폐업을 선언했다. 주세로의 몰락은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기술은 있었는데, 그 기술이 고객에게 꼭 필요한 가치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진정한 혁신의 세 가지 조건
퀴비와 주세로는 전혀 다른 산업 영역에 있었으나, 실패의 모습이 무섭도록 닮았다. 퀴비는 할리우드 거장과 모바일 시대에 맞는 새로운 콘텐츠 소비 방식을 제시했고, 주세로는 기술을 활용해 주스를 마시는 방식을 바꾸려 했다. 두 기업 모두 나름의 차별성과 가능성을 갖추고 출발했지만, 결국 같은 질문 앞에서 멈추고 말았다. ‘고객이 그 혁신을 원했나, 그리고 그것을 지속 가능한 사업으로 만들 수 있는가.’
진정한 혁신은 다음 세 가지 조건이 함께 충족될 때 비로소 힘을 가진다. △첫째, 고객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desirability) △둘째, 조직의 역량으로 실제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feasibility) △셋째, 수익을 창출하면서 장기적으로 사업이 지속될 수 있어야 한다(viability). 이 세 조건이 맞물리는 지점을 ‘혁신의 스위트 스폿(Innovation Sweet Spot)’ 이라고 부른다. 셋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아무리 그럴듯한 혁신도 시장에서 살아남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