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정보는 부족하고 위험은 많은 환경에서 오랜 시간 살아왔다. 선택은 곧 생존과 직결됐다. 선택은 결국 하나의 단순한 규칙으로 수렴된다. ‘유명하다=검증됐다’, 뇌는 인지적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이 단축 경로를 즐겨 사용한다. /사진 셔터스톡
인간은 정보는 부족하고 위험은 많은 환경에서 오랜 시간 살아왔다. 선택은 곧 생존과 직결됐다. 선택은 결국 하나의 단순한 규칙으로 수렴된다. ‘유명하다=검증됐다’, 뇌는 인지적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이 단축 경로를 즐겨 사용한다. /사진 셔터스톡
김진국 문화평론가 - 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김진국 문화평론가 - 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사람들은 유명 정치인이나 연예인을 만나면 자기도 모르게 매혹당한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로비하기도 하고, 유세장이나 공연장을 직접 찾아 나서기도 한다. 상당한 웃돈을 얹은 암표도 불사한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삼성의 이재용, 현대의 정의선 등 글로벌 셀럽이 서울 시내 한 치킨집에서 모였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기분은 ‘로또 1등 당첨자도 저리 가라’였을 것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방탄소년단(BTS) 공연이 있을 때 보여준 대중의 뜨거운 반응도 대표적인 사례다. 그렇게 유명인과 만난 사진을 소셜미디어(SNS)에 자랑스레 포스팅하거나, 사무실이나 거실 벽에 보란 듯이 걸 것이다. 대화하거나 글을 쓸 때도 가능한 한 유명인의 말을 인용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들은 왜 유명인에게 끌릴까. 우리는 어떤 인물을 보며 자연스럽게 호감을 느끼고 때로는 동경하며, 그를 통해 자기 삶을 비춰본다. 이 감정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다. 그 안에는 서로 다른 차원의 심리가 동시에 작동한다. 하나는 생존을 위해 형성된 진화적 알고리즘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는 내면의 구조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져본다. 만일 그 사람의 유명함을 제거해도 우리는 여전히 그 사람을 좋아할까. 이 질문을 기억하고 글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타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유명하다=검증됐다’로 인지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인간은 정보는 부족하고 위험은 많은 환경에서 오랜 시간 살아왔다. 선택은 곧 생존과 직결됐다. 이런 조건에서 뇌는 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반복해 왔다. ‘저 사람을 따를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회로가 바로 유명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설명한다. 첫 번째 회로는 지위 추적 본능(status tracking instinct)이다. 뇌는 무의식적으로 누가 높은 위치에 있는지 계속 스캔한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더 많은 자원과 보호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유명인은 이 지위 신호(status signals)를 강하게 발산한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검증의 표시로 작동한다. 두 번째 회로는 성공 편향(success bias)이다. 인간은 성공한 사람을 모방하려는 경향이 있다. 직접 실패를 경험하기보다 검증된 길을 따르는 것이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회로는 연합 형성 전략(alliance formation strategy)이다. 많은 사람이 따르는 인물은 강한 집단을 형성하기 마련이고, 그러한 다수의 집단에 속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여기에 비용 신호 이론(costly signaling theory)이 더해진다. 많은 자원을 들여야 유지되는 명성은 그 자체로 능력의 증거다. 유명세는 쉽게 얻을 수 없는 만큼 더욱 신뢰받는다. 이 모든 회로는 결국 하나의 단순한 규칙으로 수렴된다. 유명하다=검증됐다, 뇌는 인지적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이 단축 경로를 즐겨 사용한다. 그런데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현대사회의 유명세는 실제 능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미디어는 누구든지 주목받게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 뇌는 여전히 수만 년 전의 기준으로 반응한다. 이것이 진화적 미스매치다. 우리는 낡은 지도를 들고 이미 재개발된 새로운 도시를 걷고 있는 셈이다.

끌리는 유명인 따라 자기 내면 투사돼

이제 시선을 안으로 돌려보자. 융 심리학의 관점에서 인간은 외부 대상을 그대로 인식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 내면을 외부에 투사한다. 융(C. G. Jung)에 따르면, 무의식에는 인류가 오랜 세월 공유해 온 원형적 이미지가 존재한다. 영웅·왕·현자·조력자·전사· 트릭스터. 이 원형(archetype)은 특정 인물을 만날 때 자극된다. 그 자극이 강렬한 감정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어떤 유명인에게 강하게 끌릴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실제로 좋아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그 사람이 건드린 내 안의 무언가에 반응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자기 욕망과 가능성 그리고 결핍을 외부에 투사한다. 성공한 인물을 보며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존경이 아니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에 대한 반응이다. 반대로 어떤 인물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의 그림자(shadow), 즉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내면의 측면이 자극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방송인 다섯 명을 비교해 보자. 유재석과 신동엽은 안정과 신뢰의 상징이다. 그들은 타인을 살리고 관계를 조율하며, 함께하는 사람을 빛나게 한다. 그들은 우리 안의 조력자(caregiver), 혹은 협력형 리더(collaborative leader) 원형을 자극한다. 그들은 자신의 빛으로 무대를 채우지 않는다. 오히려 빛을 나누어 줌으로써 더 큰 무대를 만든다. 이 방식은 위협적이지도, 경쟁 심리를 자극하지도 않는다. 그 결과 넓고 오래 사랑받는다. 그들을 좋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에게서 우리는 내가 바라는 관계의 모습, 혹은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을 본다.

강호동은 다르다. 그는 강한 에너지와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진 캐릭터다. 그는 왕(king)과 전사(warrior)의 원형을 자극한다. 그는 공간을 장악하고 흐름을 지배한다. 이런 인물은 보는 사람에게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 감정이 존경이 될 때 사람들은 열렬히 따른다. 그러나 그 감정이 경쟁 심리나 위축감으로 바뀌면 사람들은 거리를 둔다. 강호동에 대한 호불호가 뚜렷한 것은 그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자극하는 원형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강렬한 원형은 강렬한 투사를 낳는다.

이휘재와 박나래는 흥미로운 경우다. 그들은 예측 불가능하고 경계를 가로지르는 에너지를 가진 캐릭터다. 융의 개념으로 말하면 트릭스터(trickster) 원형에 가깝다. 트릭스터는 기존 질서를 흔들고 웃음과 충격을 동시에 만든다. 이 역할은 집단에 활력을 준다. 그러나 동시에 예측 가능성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불안 신호(anxiety signal)로 작동한다. 당연히 반응이 엇갈린다. 그들에게 끌리는 사람은 자신 안의 자유롭고 해방된 측면을 그들에게서 본다. 불편한 사람은 자신이 억누르고 있는 무언가가 건드려지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사적인 영역에서도 트릭스터 원형을 구현하는 악동 이미지가 누적된다면, 불편함을 느끼는 대중은 늘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명세 제거해도 여전히 그 사람 좋아할까

결국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은 우리가 원하는 것의 지도다. 유재석이나 신동엽에게 끌리는 사람은 조화와 연결을 원한다. 강호동에게 끌리는 사람은 힘과 주도권을 원하거나, 자신에게 없는 그것을 갈망한다. 이휘재, 박나래에게 끌리는 사람은 자유와 자발성을 원한다. 안정은 지속성을 만들고, 강렬함은 깊이를 만들며, 불확실성은 분열을 만든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유명인에게 끌리는 것은 두 가지 힘의 합작이다. 진화는 방향을 제시한다. 뇌는 유명한 사람을 향해 자동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것은 수만 년간 작동해 온 생존 프로그램이다. 의식이 개입하기도 전에 반응부터 먼저 나온다. 그러나 심리는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가 어떤 유명인에게 끌릴 때 그 끌림 안에는 나의 원형적 기억, 나의 욕망, 나의 결핍, 나의 그림자가 함께 작동한다. 이것을 이해하면 우리는 다르게 볼 수 있다. 내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내게 무엇을 주는지. 내가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이 내 안에서 무엇을 건드리는지. 그 감정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우리를 이해하는 통로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어떤 사람의 유명세를 제거해도 우리는 여전히 그 사람을 좋아할까. 이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유명세를 걷어낸다는 것은 지위 신호를 제거하는 것이다. 성공 편향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의 검증이라는 방어막을 걷어낸다. 그 상태에서도 여전히 끌린다면, 그것은 진짜 끌림이다. 원형이 울린 것이다. 우리 안의 무언가가 그 사람과 공명한 것이다. 

반대로 유명세가 사라지는 순간 감정도 사라진다면, 우리는 그 사람 자체를 좋아했던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발산한 신호를 좋아했던 것이다. 이를 깨닫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뇌는 원래(?)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다만 그 깨달음은 우리를 조금 더 자유롭게 한다. 그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는 순간, 우리는 타인을 분석하는 일을 멈추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유명인에게 끌리는 마음의 이중 구조는 결국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김진국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