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4000m가 넘는 고지대에 사는 티베트인은 당뇨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 적혈구가 저산소 환경에서 포도당을 흡수하는 스펀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진 셔터스톡
해발 4000m가 넘는 고지대에 사는 티베트인은 당뇨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 적혈구가 저산소 환경에서 포도당을 흡수하는 스펀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진 셔터스톡

해발 4000m가 넘는 고지대에 사는 티베트인은 당뇨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 과학자들이 그 비결을 발견했다. 온몸에 산소를 공급하는 적혈구가 저산소 환경에서 포도당을 흡수하는 스펀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미국 글래드스톤연구소의 이샤 제인(Isha Jain) 박사 연구진은 “적혈구가 세계 최고봉 같은 저산소 환경에서 포도당을 흡수해 산소를 전달하는 능력을 강화하며, 부수적으로 혈당 수치를 낮추는 효과도 가져온다”고 2월 20일(현지시각) 국제 학술지 ‘셀 메타볼리즘’ 에 밝혔다. 그렇다면 환자의 몸을 티베트인처럼 저산소 조건으로 맞추면 당뇨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앞서 같은 방식으로 선천성 신경 질환을 치료한 바 있다.

티베트인 당뇨병, 한족 3분의 1에 그쳐

산소 농도가 낮은 고지대에 거주하는 사람은 해수면 근처에 사는 사람보다 당뇨병 발병률이 낮다. 2017년 중국 질병통제센터 발표에 따르면, 한족의 당뇨병 유병률이 14.7%로 중국 민족 중 가장 높았지만, 티베트인은 4.3%에 그쳤다. 하지만 어떻게 고지대 환경이 당뇨병을 막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제인 박사 연구진은 앞서 연구에서 생쥐가산소가 부족한 공기를 호흡하면 혈당 수치가 정상보다 현저히 낮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생쥐가 먹이를 먹고도 포도당을 빠르게 소모해 당뇨병 위험이 줄었다는 의미다.

연구진은 포도당이 혈액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라고 추정했지만, 주요 장기 어디에서도 확인하지 못했다. 이번 논문 제1 저자인 욜란다 마르티-마테오스 박사는 “저산소 상태의 생쥐에게 당분을 투여하자 혈류에서 즉시 사라졌다”며 “근육과 뇌, 간 등을 모두 살폈지만, 어느 장기도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포도당이 다른 장기로 이동하는 대신 혈액 속 적혈구가 포도당을 흡수했음을 밝혀냈다. 생쥐를 저산소 조건에서 키우자, 적혈구가 크게 늘었을 뿐만 아니라, 정상 산소 조건에서 생성된 적혈구보다 더 많은 포도당을 흡수했다. 적혈구가 포도당을 흡수하는 것은 저산소 환경에 적응하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다. 연구진은 적혈구가 포도당을 흡수해 인체 조직 곳곳에 산소를 방출하는 데 도움을 주는 분자를 생성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미국 글래드스톤연구소의 욜란다 마르티-마테오
스 박사가 혈액이 들어있는 시험관을 점검하고 있
다. 글래드스톤연구소 과학자들은 적혈구가 저산소
환경에서 숨겨진 포도당 스펀지 역할을 한다는 사실
을 발견했다. /사진 미 글래드스톤연구소
미국 글래드스톤연구소의 욜란다 마르티-마테오 스 박사가 혈액이 들어있는 시험관을 점검하고 있 다. 글래드스톤연구소 과학자들은 적혈구가 저산소 환경에서 숨겨진 포도당 스펀지 역할을 한다는 사실 을 발견했다. /사진 미 글래드스톤연구소

당뇨병 치료의 새로운 길 열어

이번 연구 결과는 당뇨병 치료에 새 길을 열 수 있다. 연구진은 생쥐가 만성 저산소 환경에 적응하면서 생긴 이점이 산소가 정상 수준으로 돌아온 뒤에도 몇 달간 지속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일시적으로 인체에 저산소 환경을 제공하면 당뇨병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미다. 제인 박사는 “이번 발견은 혈당 조절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사고방식을 열어줄 수 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앞서 연구에서 그 가능성을 입증했다. 글래드스톤연구소는 2025년 국제 학술지 ‘셀’에 발표한 논문에서 하이폭시스타트란 약물로 인체에 저산소 환경을 유도해 리증후군 치료에서 획기적인 효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리증후군은 중추신경계 손상을 일으키는 희소 유전 질환으로, 미토콘드리아가 손상되면서 나타난다.

미토콘드리아는 산소를 쓰고 에너지를 생산한다. 이 과정이 손상되면 에너지 생산에 쓰지 못한 산소가 몸에 쌓여 오히려 세포에 피해를 준다. 환자 75%가 호흡 곤란, 심장 기능 상실로 2~3세에 사망하지만, 현재로선 마땅한 치료법이 없는 실정이다.

하이폭시스타트는 적혈구의 헤모글로빈이 산소를 더 강하게 붙잡아 몸에 쌓이지 못하게 한다. 리증후군을 유발한 생쥐에게 하이폭시스타트를 투여하자 몸에서 산소 수치가 떨어지면서 수명이 세 배 이상 연장되고 뇌 손상과 근육 약화가 회복됐다. 

연구진은 하이폭시스타트가 당뇨병에 걸린 생쥐에게서도 기존 치료제보다 더 나은 효과를 보였다고 밝혔다. 논문 공동 저자인 안젤로 달레산드로 미국 콜로라도대 의대 교수는 “하이폭시스타트를 미토콘드리아 질환이 아닌 질환 치료에 처음 활용한 사례”라며 “당뇨병 치료에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길을 열었다”고 말했다.

2019년 이스라엘 히브리대 연구진이 국제 학술지 ‘셀’에 발표한 데니소바인 소녀의 복원도. /사진 이스라엘 히브리대
2019년 이스라엘 히브리대 연구진이 국제 학술지 ‘셀’에 발표한 데니소바인 소녀의 복원도. /사진 이스라엘 히브리대

네안데르탈인이 남긴 유전자 유산

티베트인이 고지대에 적응한 것은 멸종한 인류의 사촌 덕분이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UC 버클리) 연구진은 2014년 ‘네이처’에 티베트인은 혈액에서 산소를 조절할 수 있는 유전자를 데니소바인에게서 물려받아 고지대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고 발표했다. 데니소바인은 2008년 시베리아의 데니소바동굴에서 뼈가 처음 발견된 고생인류다.

현생인류의 직계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7만 년 전부터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로 대거 이주했다. 당시 유라시아에는 먼저 정착한 인류가 있었다. 바로 4만 년 전 멸종한 호모속(屬) 인류인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다. 네안데르탈인은 아프리카를 떠나 40만 년 전 유라시아에 정착했고, 데니소바인은 35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에게서 갈라져 아시아에 퍼졌다고 추정된다.

UC 버클리 연구진은 중국 한족과 달리 티베트인은 헤모글로빈 생산을 조절하는 EPAS1이라는 돌연변이 유전자를 갖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 변이 유전자는 헤모글로빈과 적혈구를 크게 줄여 해발 4000m 이상에서 흔히 나타나는 저산소증을 막는다. 산소가 부족하니 산소 수송차를 줄인 것이다.

현생인류는 누구나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를 갖고 있다. 2022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스반테 페보 독일 막스플랑크진화인류학연구소 교수는 아시아인과 유럽인 DNA 중 4%까지 네안데르탈인에서 왔다는 사실을 밝혔다. 필리핀과 파푸아뉴기니, 호주 원주민 DNA는 6%까지 데니소바인과 같다.

멸종한 인류가 물려준 유전자는 고지대 같은 극한 환경은 물론 질병까지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줬다. 페보 교수는 2021년 코로나19 팬데믹을 극복하는 데 네안데르탈인이 남긴 유전자가 도움 줬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네안데르탈인 유전자 세 개가 코로나19 중증 위험을 22% 낮췄다. 멸종한 인류의 사촌이 남긴 유전적 유산이 신약으로 발전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이영완 조선비즈 과학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