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는 삶의 이야기를 싣는다. 첫 차의 순간은 누구나 기억하고, 차 안의 대화가 추억으로 남는다. 하지만 서정적인 기억에 비해, 현실에서 자동차는 단절된 공간이다. 평소 단정하던 사람도 운전할 때면 욕설을 내뱉고, 타인에게 감춘 성격의 가면, 즉 페르소나를 벗어 던진다.
차가 격변하고 있다. 버튼으로 시동을 거나 싶더니, 터치로 바뀌었다. 시동이 아니라 부팅이다. 심지어 온라인으로 가능해졌다. 격변하는 차를 보며 에디슨의 정신을 돌아본다. 역사적으로 전기차를 최초로 상용화한 건 토마스 에디슨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전력망이 촘촘히 깔린 시대에도 충전이 골칫거리인데, 기본 인프라조차 상상하기 어려웠던 시절 그의 구상은 이사회가 보기엔 ‘똘끼’였다. 결국 그는 에디슨제네럴일렉트릭에서 쫓겨났고, 회사는 그의 이름을 삭제한 제네럴일렉트릭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GE의 전신이다.
자기가 쫓겨나는 상황에서도 에디슨의 ‘똘끼’는 새 인물을 탄생시켰다. 그의 회사 연구원인 헨리 포드가 내연기관 자동차를 구상했다. 당시 석유는 등잔불의 고래기름을 대체할 등유(燈油)에만 관심이었다. 휘발유는 쓸모없었다. 몰래 강에 버리다 벌금을 무는 정유회사도 있었다. 그러나 포드는 그 휘발유로 움직이는 자동차를 떠올렸다. 전기회사의 직원이 말이다.
하지만 에디슨은 그의 도발을 인정했다. 아니, 포드의 아이디어를 듣고 너무 환호한 나머지 책상을 꽝 내리쳤고, 그 소리가 포드에게 돌격을 알리는 대포 소리 같았다고 한다. 포드에게 에디슨은 영웅이었다. 그래서 에디슨의 마지막 숨결을 시험관에 담아 포드 박물관에 전시해 두었다.
보디(제조)와 마인드(소프트웨어)는 인공지능(AI) 시대에 더 치열하게 맞붙는다. 리더의 결정과 테크놀로지는 조직의 변화를 빠르게 끌어올리지만, 구성원은 생각보다 느리게 반응한다. 여태껏 성공한 방식이 마인드셋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제조업 레거시가 강한 우리나라 회사들은 특히 그런 경향이 강하다. 늘 독자(獨子)처럼 주목받고 살아온 사람이 나르시시즘 탓에 개방성이 떨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혁신이라고 써도 리스크라고 읽는다.
이럴 때 거리낌없는 발언과 도발을 허용하는 분위기인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이 필요하다. 의견을 말할 때 공격받지 않고 안전하게 표현할 수 있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회사 분위기다. 이것은 그리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중간 리더들조차 실패의 가치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워 서로 갈등하는데, 현장 직원은 더 그럴 게다. 실패를 회피하는 건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동기다. 자신의 안전한 공간에 AI와 로봇이 들어오는 상황에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건 어쩌면 여유 있는 자의 낭만처럼 들릴 수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심리적으로 안전한 성장 공간이다. 단순히 임금과 고용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동기(動機)는 기대(확률)와 가치의 곱셈이니, 실패할 거 같다는 생각(실패의 기대)이 크면 초점을 바꿔야 한다. 결국 리더는 실패의 지평을 넓히는 내러티브가 필요하다.
우리는 과거와 소통하며, 삶의 고난을 통해 더 넓게 본다. 예컨대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도발로 간이 매일 까마귀에 의해 쪼이는 벌을 받았다. 그런데 간은 해가 뜨면 재생되었다. AI가 만드는 변화 앞에선 단지 가치(value)를 말하기보다 인간다움의 덕목(virtue)을 보여주는 리더가 구성원의 안전망이다. ‘나 때(라떼)는 말이야’하는 페르소나보다, 실패를 겪어본 리더의 서사가 때론 인간적이다. 그도 결국 사람이었구나 하는 느낌을 준다. 그는 계속 동행할 것 같다. 그렇게 고난을 함께 하는 덕목의 정점은 자기희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