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모삼천(孟母三遷)이나 맹모단기(孟母斷機)의 고사는 바로 이 책 ‘모의’ 편에 실려서 세상에 널리 전해졌다. ‘모의’란 어머니의 본보기란 뜻이다. 관노가 되어 아버지 대신 죗값을 치르겠다고 한 제영(緹嫈)의 이야기는 유향이 ‘사기(史記)’에서 옮겨와 ‘변통’ 편의 마지막에 ‘제태창녀(齊太倉女)’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제영의 논리 정연한 언변을 담은 상소문이 문제(文帝)를 감동시켜 그 뜻이 통함으로써 아버지를 구했기 때문이다. 인구(人口)에 회자(膾炙)하는 추호(秋胡)와 그 아내의 이야기도 ‘절의’ 편의 ‘노추결부(魯秋潔婦)’에 나온다.
노(魯)의 추호자(秋胡子)는 아내와 혼인한 지 닷새 만에 집을 떠나 벼슬을 구하기 위해 진(陳)으로 갔다가 5년 뒤에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기 직전에 길가에서 뽕잎 따는 여인을 본 그는 그 미색에 혹해 수레에서 내려 말을 걸었다. “땡볕에서 뽕잎을 따시는데 저는 먼 길을 왔으니, 뽕나무 그늘에서 잠시 쉴까 합니다.” 대꾸를 하지 않고 계속 뽕잎을 따는 여인에게 추호자가 수작을 걸었다. “힘써 밭을 갈아봐야 풍년을 만나는 것보다 못하고, 힘들여 뽕잎을 따도 벼슬아치를 만나는 것보다 못하답니다(力田不如逢豐年, 力桑不如見國卿). 제게 금이 있으니, 부인께 드리겠습니다.” 이에 여인은 뽕잎 따기와 실 잣고 베 짜는 것으로도 양친을 모시고 잘살 수 있으니, 금을 거두어들이라고 대답했다. 멋쩍게 된 추호자는 할 수 없이 자리를 떴다. 집에 도착한 그는 어머니에게 금을 드리고 아내를 불렀다. 잠시 후 도착한 아내를 보니 바로 조금 전에 뽕잎 따던 그 여인이었다. 부끄러워하는 남편을 보고 아내가 차갑게 말했다. “부모를 떠나 5년 만에 돌아왔으면 기쁜 마음으로 먼지를 일으키며 급히 달려와야지, 길가의 여인을 보고 좋아서 금을 주겠다니, 이는 부모를 잊은 처신입니다. 부모를 잊은 불효와 색을 좋아한 음란함은 더러운 행실입니다.” 이어서 아내는 이런 남편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으니, 새사람을 구하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뛰쳐나갔다. 동쪽으로 달려간 그녀는 마침내 강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여기서 유향은 “선을 보면 미치지 못한 듯이 하고, 불선을 보면 끓는 물에 손을 담그는 듯이 한다(見善如不及, 見不善如探湯)”는 ‘논어(論語)’의 ‘계씨(季氏)’ 편에 있는 말을 인용해 추호자의 아내를 칭송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걱정해 ‘요사(遼史)’의 작가는 ‘열녀전’에서 “열녀를 얻느니 현녀를 얻는 것이 낫다(與其得烈女, 不若得賢女)”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여러 시인에 의해 시로 지어졌다. 서진(西晉)의 부현(傅玄)과 남북조시대 송(宋)의 안연지(颜延之)가 쓴 서사시 ‘추호행(秋胡行)’이 많이 알려졌다. 원(元)나라 때는 석군보(石君寶)가 ‘추호희처(秋胡戲妻)’란 희곡을 지었으며, 여기서 비롯된 경극(京劇) ‘상원회(桑園會)’도 널리 공연되고 있다.
역대 사서에게 영향 준 유향 ‘열녀전’
유향의 ‘열녀전’은 후대의 역사 편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서진 초에 황보밀(皇甫謐)은 후한과 삼국시대 여인들의 행적을 모은 ‘열녀전’을 지었으며, 그 뒤에도 여러 작가에 의해 유사한 성격의 저술이 더러 나왔다. 역대의 관찬(官撰) 사서에도 ‘후한서(後漢書)’를 필두로 거의 다 ‘열녀전’이 실렸다. 그중에서 ‘수서(隋書)’에 기록된 선부인(洗夫人)의 이야기를 눈여겨 볼 만하다.
선부인은 500년대 초 남북조시대 양(梁)나라 때 태어나 수(隋)나라 때인 602년까지 살았으니 80세 이상 장수한 셈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남쪽 변방 이민족 지역인 남월(南越)의 부락 10여만 호를 거느렸다. 어려서부터 현명하고 지략이 뛰어났던 그는 군사적 재능도 있어서 주위를 잘 제압할 수 있었다. 나주자사(羅州刺史) 풍융(馮融)이 소문을 듣고 그 아들 고량태수(高涼太守) 풍보(馮寶)의 아내로 맞아들였다. 당시 고량 지역은 기강이 문란한 상태여서 선부인은 이를 바로잡는 데 앞장섰다. 소송이 있을 때는 남편과 함께 참여해 권세 있는 자가 법을 어기면 친족이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정령이 바로 서서 감히 어기는 자가 없었다. 후경(侯景)의 난 때 함께 반란을 일으킨 이천사(李遷仕)가 풍보를 불렀다. 선부인은 그 음모를 간파하고 남편을 못 가게 말린 다음 직접 1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지략으로 적을 쳐서 크게 이겼다. 남편이 죽은 뒤에는 혼란스러워진 지역을 잘 무마해 평온을 되찾았다. 진(陳·557~589)나라 때는 반란을 일으킨 광주자사(廣州刺史) 구양흘(歐陽紇·537~569)이 선부인의 아들 풍복(馮僕)을 유인해 끌어들인 일이 있었다. 선부인은 아들 때문에 나라를 배반할 수 없다는 결의로 난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이 때문에 패주한 구양흘은 결국 붙잡혀 도성으로 압송된 뒤 처형됐다. 어린 아들은 다행히 구출돼 당나라 때 대신으로 출세했다. 그가 바로 서예가로 유명한 구양순(歐陽詢·557~641)이다. 선부인은 난을 평정한 공으로 여성으로서 이례적인 중랑장(中郎將)에 임명되고 많은 하사품을 받았으며, 풍복도 어머니 덕에 신도후(信都侯)에 봉해졌다. 지역에서는 그를 ‘성모(聖母)’로 부르며 추앙했다. 수나라 때는 번우(番禺)의 호족 왕중선(王仲宣)이 반란을 일으켜 광주(廣州)를 포위하자, 선부인은 손자 풍앙(馮盎)을 보내 반란에 가담한 진불지(陳佛智)를 쳐서 참수했다. 이어서 풍앙은 조정에서 파견된 배구(裴矩)가 관군을 이끌고 오자, 이와 연합해 왕중선을 물리치고 광주의 포위를 풀었다. 그 뒤 갑옷 차림에 전마를 타고 비단 일산을 펼쳐 든 선부인은 활을 맨 기병들을 거느리고 배구를 수행, 여러 주를 순무(巡撫)했다. 이에 문제(文帝) 양견(楊堅)이 풍앙을 고주자사(高州刺史)로 임명하고, 풍보에게 초국공(譙國公)을 추증하면서 선부인을 초국부인(譙國夫人)에 책봉했다. 이후에도 지역의 소수민족이 반란을 일으킬 때 선부인은 조정을 대표해서 각지를 돌며 항복시켰다.
저우언라이도 칭송한 선부인
북송(北宋)의 소식(蘇軾)이 도연명(陶淵明) 시의 운에 맞추어 지은 작품 중에 ‘화도의고구수(和陶擬古九首)’가 있다. 그 다섯 번째 작품이 ‘제선부인묘(題洗夫人廟)’로 불린다. 선부인의 연고지인 영남(嶺南) 지역에서 유배생활 중이던 말년에 그 사당을 방문한 감회를 적은 것이다. 작품 속에는 ‘수서’의 기록이 잘 활용돼 있다.
이런 행적을 남긴 선부인에게 중국의 전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중국의 건괵영웅 중에 제일가는 사람(中國巾幗英雄第一人)’이라고 찬사를 보낸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건괵’은 고대의 여성들이 머리에 쓰는 두건(頭巾)과 같은 장식물로, 여성을 상징하는 말이다.
선부인과 유사한 건괵영웅으로 명(明) 말기의 진양옥(秦良玉·1574~1648)이 있다. 그도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고 청군(淸軍)의 침입을 막기 위해 여러 전장을 누볐다. 그 공으로 충정후(忠貞侯)에 봉해지기까지 했다. 후대의 사가들도 이 점을 높이 사서 그 일대기를 ‘열녀전’에 넣지 않고 마세룡(馬世龍), 양조기(楊肇基) 등 유명 장수들과 함께 ‘명사(明史)’의 열전 제158권에 편입했다. 극히 이례적인 특별한 경우다.
근년에 와서는 부호(婦好)도 각광받는 건괵영웅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1970년대에 다시금 발굴된 은허(殷墟)의 유적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면서부터다. 갑골문(甲骨文)과 청동기 명문을 통해 그는 상(商)나라 왕의 아내로서 군대를 이끌고 출정해 혁혁한 무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 북송 말기의 명장 한세충(韓世忠)을 도와 많은 전과를 거둔 아내 양홍옥(梁紅玉)도 유명하며, 아버지를 대신해 종군했다는 화목란(花木蘭)의 이야기도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후자는 남북조시대의 시가 ‘목란사(木蘭辭)’에 등장하는 허구적 인물로서 그 실체가 불분명하다. 명나라 때 지어진 소설 ‘양가부연의(楊家府演義)’의 목계영(穆桂英)이나 청나라 때의 ‘설정산정서(薛丁山征西)’에 등장하는 번리화(樊梨花)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