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운의 꿈을 품고 한국해양대에 입학한 지 4년이 지났을 때, 마침내 졸업을 하고 산코라인이라는 좋은 회사에 취업했다. 1982년 3월 어느 날, 일본의 나리타국제공항에서 8시간 정도 기다린 뒤 KLM 항공기에 올랐다. 두바이국제공항에 도착해 다시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코랄파칸의 한 모텔에 도착해서 3일을 기다렸다. 코랄파칸은 오만 쪽 항구로, 페르시아만으로 들어가는 선박이 부식 공급이나 선원 교대를 위해 들르는 곳이었다. 통선을 타고 드디어 내가 1년을 근무할 선박인 페넬로페 오브 요크(Penelope of York)호에 올랐다. 거대한 산과 같은 배였다. 선장과 선배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우리를 태운 배는 바로 라스타누라로 들어가 원유를 선적했다. 그리고 배는 곧 출항했다. 첫 당직에 들어갔다. 선교에서 해도를 보며 우리 배가 항해할 곳을 살폈다. 우리 배는 사우디 아람코에 용선돼 페르시아만에서 생산된 원유를 서부 얀부항으로 실어 나르는 항해를 반복하게 돼 있었다. 육상에 큰 저장소가 있었다. 혹시라도 호르무즈해협이 막힐 때를 대비해 미국과 사우디가 안전한 저장소를 여기에 둔다는 설명이었다.
이 선박에서의 1년은 나에게 석유와 원유에 관심을 두게 한 시간이었다. 유조선의 운항 방식, 원유 생산지, 오일 메이저 등에 흥미를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는 훗날 내가 국제유류오염보상기금(IOPC Funds)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유류 오염 손해배상 책임 문제에 남들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
나의 이러한 ‘호르무즈해협 100회 통과’ 경험은 최근 이란 전쟁 국면에서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3월 초 개전 초기, 나는 사우디가 얀부항에서 안전하게 기름을 실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했다. 그 내용을 담은 칼럼이 조선일보 3월 5일 자에 실렸다. 이어 대체 선적항으로 얀부항이 제 기능을 하려면 홍해가 열려야 하고, 홍해 입구인 바벨만데브해협이 막히면 안 되므로 우리나라는 연합군과 함께 이곳을 지켜야 한다는 취지의 두 번째 칼럼을 매일경제 3월 20일 자에 게재했다.
실제 사우디는 라스타누라항에서 얀부항까지 육상 파이프라인을 이용해 원유를 보내고 있었다. 이후 정부도 얀부항을 적극 활용하는 방안을 발표했고, 국내 언론 역시 얀부항 기능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 두 편의 칼럼이 정부의 이러한 결정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본다.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의 승선 경험이 해상운송 전문가인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당시 사우디에서 피스톤 항해를 하면서 힘들었던 고생이 보람으로 승화함을 느낀다. 당시 애환을 같이했던 선원들의 안부를 묻는다. 안전 항해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