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야를 넓혀보면, 17~18세기 네덜란드 길더(Guilder), 14~15세기 피렌체 플로린(Flo-rin), 더 거슬러 올라가 고대 로마의 은화 데나리우스 등과 같은 실로 유구한 국제통화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최초의 진정한 국제통화는 로마의 데나리우스라고 할 수 있다. 데나리우스 은화 매장물(hoard)은 옛 로마제국 영토 곳곳은 물론, 인도와 스리랑카를 거쳐 중국에 이르는 실크로드 일대에서도 발견됐다. 이 매장물이 묻힌 시기는 아시아 각지 상품이 유럽에 도착한 시기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로마 관리는 교역을 관장하고, 막강한 군사력이 이를 뒷받침했으며, 안정적이고 균일한 화폐가 거래를 매개했다. 품질 보증을 위해 오직 로마 당국만 은화와 금화를 주조할 수 있었다. 주화 발행은 원로원 소관이었고, 원로원 의원은 조폐를 감독하는 하급 행정관 ② 트레스비리(Tresviri)에게 정기 보고를 받았다.
이런 엄격한 관리 덕에 데나리우스의 은 함량은 무게와 순도 모두 300년간 흔들림 없이 유지됐다. 주화가 균일하니, 상인은 대금의 가치를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무겁고 값비싼 주화나 은괴(bullion)를 직접 옮기지 않고도 결제가 가능했다. 한 곳에 주화를 맡기고 다른 곳에서 매매 대금을 정산하는 방식이 자리 잡으면서 귀금속 운반 비용과 위험은 사라졌고, 화폐는 자연스레 신용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근대 금융시장의 씨앗이 여기서 싹 튼 셈이다.
로마의 사례에서 국제통화로 널리 통용되기 위한 핵심 요건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품질 보증, 상업적 역량, 고도화된 금융 체계, 정치적 견제와 균형 그리고 발행국의 지정학적 안보다. 동시에 로마의 데나리우스 사례는 이 조건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도 일깨워준다. 세월이 흐르면서 로마제국은 관료주의의 늪에 빠졌다. 원로원이 화폐 남발을 견제하던 공화정의 민주적 전통은 1인 지배 체제에 밀려났고, 화폐 문제를 포함한 황제의 독단을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미국이 달러 가치를 직접 떨어뜨린 것은 아니지만, 이른바 '가치 훼손 거래(Debasement Trade)' 우려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미국에 황제는 없다. 그러나 민주적 전통을 위협하는 1인 지배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 제도화된 부패는 이제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다.
법치는 허물어지고, 부패는 일상이 됐으며, 재산은 권력과 결탁한 자에게 쏠렸다. 대규모 군대를 먹여 살리자니 로마 소득의 3분의 1에 달하는 세금을 걷어야 했고, 이는 제국의 상업 활동을 위축시켰다. 과중한 세 부담은 대토지 소유자의 탈세를 부추겼는데, 징세를 맡은 관리 자체가 대토지 소유자인 경우가 허다해 서로 눈감아주기 십상이었다.
결국 데나리우스의 은 함량을 낮추는 주조 변질(debasement)이 네로 황제 때 시작됐다. 네로는 야심 찬 운하 건설, 기원후 64년 대화재 뒤 로마 재건, 방 300개짜리 호화 궁전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 축조, 여러 전선의 전쟁 비용까지 감당하려고 화폐를 닥치는 대로 찍어냈다. 트레스비리는 황제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 뒤를 이은 황제도 네로가 닦아놓은 내리막길을 그대로 걸었다. 양질의 옛 주화는 사람들이 쟁여두거나 녹여 없앴고, 경제에는 거의 쓸모없는 새 화폐가 넘쳐났다. 불과 2세기 만에 데나리우스의 국제적 지위는 자취를 감췄다.
오늘날 달러를 둘러싼 불안은 이 고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중국은 이미 교역 규모에서 미국을 추월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정책은 각국을 중국 품으로 떠밀고 있고, 국가 간 특혜 무역협정 체결을 부추기고 있다.
미국이 달러 가치를 직접 떨어뜨린 것은아니지만, 이른바 ③ '가치 훼손 거래(De-basement Trade)' 우려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높은 정부 부채와 연준 독립성 훼손 가능성을 경계하는 해외투자자는 달러 구매력 하락을 우려해 미국 국채에서 발을 빼고 있다. 미국의 군사력 자체는 강력하고 안전할지 모르지만, 중동에 군사력을 쏟아붓는 데 드는 재정 부담은 부채와 달러 약세에 대한 불안을 더 키울 뿐이다. 미국에 황제는 없다. 그러나 민주적 전통을 위협하는 1인 지배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 제도화된 부패는 이제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다.
네로의 치세가 로마제국의 몰락을 예고했듯, 지금의 상황은 미국 제국의 몰락을 알리는 전조일까. 이 모든 변화가 달러에 좋을 리 없다는 사실만큼은 신탁에 기대지 않아도 될 것이다.
Tip
①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을 잇는 너비 약 33~96㎞의 좁은 수로로, 전 세계 원유 해상 물동량의 약 20%, 액화천연가스(LNG) 20% 이상이 통과하는 에너지 수송의 핵심 길목이다. 이란과 오만 사이에 있어 이란이 사실상 봉쇄 카드를 쥐고 있다. 이 해협이 막히면 사우디아라비아·이라크·쿠웨이트·아랍에미리트(UAE) 등 주요 산유국의 수출이 전면 차질을 빚어 국제 유가가 폭등한다.
② ‘세 명의 사람’을 뜻하는 라틴어로, 로마 공화정 시대 조폐를 감독하던 하급 행정관직이다. 원로원의 위임을 받아 주화의 무게·순도·발행량을 관리했으며,이들의 존재는 권력자 개인이 마음대로 화폐를 찍어낼 수 없도록 막는 제도적 견제 장치였다. 네로 이후황제 직속 하수인으로 전락하면서 이 견제 기능이 무너졌고, 데나리우스 변질이 시작됐다.
③ 원래 ‘주조 변질’은 고대에 주화의 귀금속 함량을 몰래 낮춰 더 많은 화폐를 발행하던 행위를 뜻한다. 현대 금융시장에서는 정부가 과도한 부채와 재정 적자를 통화 공급 확대로 메울 것을 우려한 투자자가 달러 표시 자산을 팔고 금·원자재·실물자산으로 이동하는 거래 전략을 가리킨다. 달러의 실질 구매력이 서서히 떨어진다는 전제 위에 세워진 베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