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는 전 세계 와인 애호가에게 가장 사랑받는 산지이자 가장 난해한 곳으로 꼽힌다. 재배하는 품종은 의외로 단순하다.
레드 와인은 피노 누아(Pinot Noir), 화이트 와인은 샤르도네(Chardonnay)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스타일 또한 너무 단조로운 것은 아닐까? 전혀 그렇지 않다. 불과 5m 떨어진 밭에서 생산된 와인조차 맛과 향이 완전히 다르고, 가격 역시 수백만원까지 격차를 보이기도 한다. 단 두 가지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 어떻게 수천 개의 다른 얼굴을 갖게 되는 걸까? 그 해답을 이 땅이 겪어온 억겁의 시간과 이를 해석하려는 인간의 집요한 노력에서 찾을 수 있다.
땅이 만든 차이, 시간이 완성한 와인
지금으로부터 1억~1억5000만 년 전, 부르고뉴는 바다 아래에 잠겨 있던 땅이었다. 오랜 세월 겹겹이 쌓인 조개, 산호, 암모나이트 등 해양 생물의 사체가 두꺼운 석회암층을 만들었고, 이후 지각변동이 일어나면서 석회질, 점토, 모래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지층이 형성됐다. 여기에 남북으로 길게 뻗은 나지막한 산줄기가 고도, 방향, 일조량, 배수 등에 미세한 변화를 더하며 토질과 미기후가 복잡하게 뒤섞인 독특한 환경을 만들어냈다.
부르고뉴에 와인을 전파한 것은 로마인 이었지만, 발전을 이끈 주역은 중세 시토(Cîteaux)회 수도사였다. ‘기도하고 일하라’ 는 규율 아래 이들은 매일 포도밭을 돌보며 그 특징을 글로 남겼고, “신이 주신 최고의 땅을 찾기 위해 혀끝으로 흙을 맛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구획마다 집요한 관찰을 이어왔다. 전해오는 기록을 보면 “비탈 아래 평지의 무거운 토양에서는 수도사용 와인이, 경사면 중간에 있는 밭에서는 추기경용 와인이 생산된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는 지역, 마을, 프리미에 크뤼(Premier Cru), 그랑 크뤼(Grand Cru)로 구분하는 지금의 부르고뉴 와인 등급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수백 년 전에 땅마다 성질이 다르고 그에 따라 와인 맛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을 정확히 파악했다는 증거다.
이러한 통찰은 부르고뉴만의 독특한 테루아(terroir·와인 생산 환경) 개념인 클리마(climat)로 이어진다. 클리마란 토질, 지형, 미기후의 유사성을 공유하며 고유한 와인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세분화된 구획을 뜻한다. 부르고뉴에는 무려 1247개의 클리마가 있다. 포도밭 전체 면적이 약 300㎢이니, 클리마의 평균 크기는 0.24㎢에 불과하다. 실제로 부르고뉴에 가 보면 자동차 한 대도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은 흙길이나 낮은 돌담을 경계로 클리마가 나뉜다.
똑같은 피노 누아를 심어도 한쪽에서는 장미 향이 그윽하고 섬세한 와인이, 다른 쪽에서는 풍미가 진하고 타닌이 견고한 와인이 생산된다. 그만큼 미세한 환경의 차이가 스타일을 극적으로 바꾸고, 부르고뉴 와인의 다양성을 창조하는 근원이 된다. 2015년 유네스코는 클리마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축적된 인간의 지식이 자연과 결합해 형성된 클리마가 모자이크처럼 모여 있는 독특한 경관이야말로 부르고뉴를 대표하는 역사적 산물임을 인정한 결과다.
맛으로 읽는 부르고뉴의 클리마
부르고뉴 와인의 다채로움은 실제로 맛을 볼 때 더욱 극명하게 느껴진다. 부르고뉴는 북단에서 남단까지 약 250㎞에 이르는 긴 산지이기에, 화이트 와인은 마을 위치에 따라 스타일이 뚜렷하게 갈린다. 가장 북쪽의 샤블리(Chablis)는 기후가 서늘해 산미가 날카롭고 레몬, 라임, 청사과처럼 상큼한 과일 향이 도드라진다. 특히 석회질 토양에서 비롯된 미네랄리티는 와인에 팽팽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중부에 있는 뫼르소(Meursault)는 한결 온화해서 레몬, 자몽, 복숭아, 살구 등 과일 향이 부드럽고 산미 또한 둥글다. 전통적으로오크통 숙성을 거치는 이곳 와인은 버터, 견과, 토스트 같은 아로마가 복합미를 더하며 풍부하고 우아한 스타일을 자랑한다. 남쪽의 푸이-퓌세(Pouilly-Fuisse)는 기온이 더 높아 샤르도네의 완숙도가 뛰어나다. 와인에서 파인애플과 멜론처럼 달콤한 열대 과일 향이 느껴지고, 묵직한 보디감이 풍만한 질감으로 입안을 가득 채운다.
레드 와인 역시 마을 간 개성이 분명하다. 나폴레옹이 즐겨 마셨다는 쥬브레-샹베르탱(Gevrey-Chambertin)은 가장 화려한 피노 누아라는 찬사를 받는다. 체리, 자두 등 잘 익은 과일과 여러 향신료 향이 풍성하게 어우러지고, 탄탄한 구조감에서는 힘이 느껴진다. 샹볼-뮈지니(Chambolle-Musigny)는 쥬브레-샹베르탱에서 겨우 5㎞ 떨어져 있는 마을이지만,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다. 가장 섬세한 피노 누아라는 평이 지배적인 이곳 와인은 크랜베리와 라즈베리처럼 싱그러운 붉은 베리와 화사한 꽃향기가 중심을 이루며, 실크 같은 타닌이 입안을 매끈하게 어루만진다.
한편 포마르(Pommard)에서는 피노 누아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강건한 와인이 생산된다. 토양에 철 성분이 많아 타닌이 단단하기 때문인데, 블랙 체리 같은 검은 베리류의 향이 진하고 숙성이 진행될수록 정향, 후추, 감초, 가죽 같은 복합미가 발달하며 야성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부르고뉴 와인을 마시다 보면 샤르도네와 피노 누아가 연주하는 다양한 변주곡을 감상하는 기분이 든다. 각각의 클리마가 두 품종을 악기 삼아 테루아를 듬뿍 담은 선율과 화음을 탄생시켰다고나 할까. 수억 년에 걸친 지질학적 사건과 지난 2000년간 인간이 쌓아온 노력이 한 잔의 와인에 담겨 있는 셈이다. 그래서 부르고뉴 와인은 ‘무엇으로 만들었는가’보다 ‘어디에서 왔는가’가 더 중요하다. 레이블에 적힌 낯선 클리마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