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몸에 레이저 빛을 쏘면 항암제가 암세포만 골라 파괴한다. 전폭기가 폭탄을 투하하고 레이저로 목표물을 지정하는 것과 같다. 미국의 웰컴 리프(Wellcome Leap)는 “핀란드의 양자 소프트웨어 기업인 알고리드믹(Algorithmiq)과 미국 IBM, 클리블랜드 클리닉 공동 연구진이 퀀텀포바이오(Q4Bio) 대회에서 광감응성 항암제 개발 연구로 최종 우승해 상금 200만달러(약 29억5800만원)를 받았다”고 4월 16일(이하 현지시각) 밝혔다.
웰컴 리프는 영국의 웰컴 트러스트가 미국 샌디에이고에 설립한 비영리 연구 재단이다. 2023년 시작된 퀀텀포바이오는 생명과학과 의학 연구에 양자 컴퓨터를 활용하는 연구 능력을 겨루는 대회로, 향후 3~5년 내 등장할 상용 양자 컴퓨터에서 쓸 수 있는 바이오 연구용 양자 알고리즘을 개발하게 했다. 알고리즘은 하드웨어인 컴퓨터가 문제를 해결하는 절차나 방법이고. 이를 코드로 구현한 프로그램이 소프트웨어다.
빛 받아 암세포 죽이는 과정 시뮬레이션
알고리드믹 컨소시엄 연구진은 IBM의 양자 컴퓨터를 이용해 광감응성 항암제의 핵심 작용 과정을 시뮬레이션(모의실험)했다. 원리는 이렇다.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항암제를 인체에 주입해 암세포를 찾아가도록 한다. 이후 밖에서 레이저를 쏘면 항암제가 활성산소를 만들어 암세포만 골라 죽인다.
연구진은 약물 분자 하나가 빛 입자인 광자와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시뮬레이션했다.
물론 모든 과정을 양자 컴퓨터로 한 것은 아니다. 아직 그 정도 능력을 갖춘 양자 컴퓨터가 없기 때문이다. 일부 시뮬레이션은 기존 컴퓨터로 했다. 사브리나 마니스칼코 알고리드믹 대표는 “앞으로 더 강력한 양자 시스템에서 같은 알고리즘을 실행하면 고전적 시뮬레이션으로는 불가능한 분자 정보를 도출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며 “이 알고리즘은 새로운 항균제 설계 같은 다른 분자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양자 컴퓨터와 인공지능(AI)은 최근 신약 개발의 패러다임을 바꿀 기술로 부상했다. 신약 하나를 개발하려면 10년 이상, 수조원이 들지만, 성공률은 10%도 안 된다.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AI는 이미 신약 개발 기간을 평균 40~60% 단축하고 비용을 최대 70%까지 절감했다. 약물이 인체와 반응하는 모든 경로를 컴퓨터를 통해 시뮬레이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자 컴퓨터는 현재 AI보다 신약 개발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 작동 방식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한남식 연세대 양자정보학과 교수는 “기존 AI는 한 번에 하나의 경로만 탐색하지만, 양자 알고리즘은 양자 특성 덕분에 ‘손오공의 분신술’처럼 여러 경로를 동시에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1만 년 걸릴 문제 200초 만의 해결
현재 컴퓨터는 전자가 없거나 있는 것을 0과 1, 즉 비트(bit) 단위로 표현한다. 반면 양자 컴퓨터의 단위는 0과 1 상태가 중첩된 큐비트다. 일반 컴퓨터가 2비트이면 00, 01, 10, 11 네 가지 중 하나가 되지만, 2큐비트는 네 가지가 동시에 다 가능하다. 만약 큐비트가 300개라면 우주의 모든 원자 수보다 많은 2의 300제곱 상태가 가능해, 컴퓨터 연산 능력이 획기적으로 좋아진다.
2025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존 마티니스 UC 샌타바버라 교수가 이끈 구글 양자 AI 연구진은 2019년 10월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현존 최고의 슈퍼컴퓨터로 1만 년 걸릴 난수 증명 문제를 양자 컴퓨터로 200초 만에 해결했다고 발표했다. 양자 컴퓨터가 슈퍼컴퓨터를 능가하는, 이른바 ‘양자 우위’ 가 처음으로 달성된 순간이었다. 당시 연구진은 큐비트 53개를 갖춘 시카모어 양자 칩을 사용했다.
퀀텀포바이오 주최 측은 200만달러 상금 수상 기준으로 큐비트 50개 이상으로 연산 단계가 1000~1만 개인 회로 깊이를 제시했다. 양자 컴퓨터의 작동 원리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이 정도 회로 깊이는 밀리초(1000분의 1초)에서 수 초 만에 계산이 가능한 수준이다.
대표적인 양자 컴퓨터 방식은 초전도 회로와 이온 트랩(덫)이다. 구글이나 IBM은 극저온에서 전기저항이 사라지는 초전도 상태에서 큐비트를 구현했다. 이번 대회에서 결선에 진출한 6개 팀 중 5개 팀이 IBM의 양자 컴퓨터를 사용했다. 이온 트랩은 전기를띤 이온을 두 상태가 중첩된 상태로 가두는 방식을 쓴다. 미국 듀크대 김정상 교수가 창업한 아이온큐(IonQ)는 2025년 6월 큐비트 36개를 갖춘 이온 트랩 양자 컴퓨터로 아미노산 사슬이 접히면서 단백질의 삼차원 구조를 만드는 과정을 시뮬레이션했다.
게놈 유전자 해독에도 활용 기대
AI는 이미 2017년을 기점으로 신약 개발에 본격적으로 활용됐다. 미국의 AI 컨설팅 업체인 인튜이션랩에 따르면, 임상 개발 단계에 있는 AI 신약 프로그램은 173개 이상에 달하고, 올해만 15~20개 프로그램이 임상 3상 시험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양자 컴퓨터가 발전하면 AI의 신약 개발 속도가 더 빨라질 수 있다. 특히 환자 고유의 유전정보에 기반한 맞춤형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다.
인간의 유전정보가 담긴 게놈(유전체)은 약 32억 개의 염기쌍으로 구성된다. 생명체는 염기가 배열된 순서에 따라 아미노산을 연결해 모든 생명 현상을 관장하는 단백질을 만든다. 인간의 염기 정보를 디지털 정보로 환산하면 64억 비트 또는 750메가바이트가 된다. 이 정도면 큐비트 33개만으로 모두 저장할 수 있다. 인류의 모든 유전정보를 저장하는 데도 큐비트 100개 미만으로 가능하다.
영국 생어연구소와 옥스퍼드대 연구진은 4월 9일 D형 간염바이러스 유전체를 모두 IBM 양자 컴퓨터에 탑재하는 데 세계 최초로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들도 이 연구로 퀀텀포바이오에서 결선에 진출했다. 특정 생물 유전체 전체를 양자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는 형식으로 변환한 것이다.
다만 상용화까지는 과제가 남아 있다. 양자 컴퓨터 오류 문제를 해결해야 생명과 직결되는 유전체 분석에 쓸 수 있다. 고도로 최적화된 기존 컴퓨팅 알고리즘과 효율성 경쟁도 넘어야 할 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