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론으로 촬영한 그리스 산토리니 마을. /사진 로이터연합
드론으로 촬영한 그리스 산토리니 마을. /사진 로이터연합
“색은 힘이다. 그것을 지배하는 자가 공간을 지배한다.” 바우하우스의 색채 이론가 요하네스 이텐은 색을 미학이 아닌 권력의 언어로 봤다. 그리고 도시 브랜딩은 결국 이 ‘지배력’을 설계하는 작업이다. 도시 브랜딩에서 색은 고르는 순간이 아니라 견디는 시간 속에서 완성된다. 도시의 색은 네 가지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역사가 만든 색, 삶이 만든 색, 규제가 만든 색 그리고 설계된 색이다. 역사가 색을 선택한 나라, 우연이 규제가 된 섬, 색을 지워 도시를 만든 고도(古都) 그리고 색을 설계해 경제를 바꾼 도시의 이야기다.
황부영 - 브랜다임앤 파트너즈 대표 컨설턴트, 현 부산 도시 브랜드 총괄 디렉터, 현 아시아 브랜드 프라이즈(ABP) 심사위원, 전 제일기획 마케팅연구소 브랜드팀 팀장
황부영 - 브랜다임앤 파트너즈 대표 컨설턴트, 현 부산 도시 브랜드 총괄 디렉터, 현 아시아 브랜드 프라이즈(ABP) 심사위원, 전 제일기획 마케팅연구소 브랜드팀 팀장

전쟁이 만든 색–네덜란드 오렌지

네덜란드 하면 튤립과 풍차 그리고 오렌지색이 떠오른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오렌지를 재배하기에 적합한 기후가 아니다. 이 색이 국민 색이 된 것은 과일과 무관하다. 오렌지색이 뿌리를 내린 곳은 온실이 아니라 전쟁터였다.

이야기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페인의 지배에 맞선 네덜란드 독립 전쟁(1568~1648)을 이끈 인물이 오라녜-나사우 가문의 빌럼 1세였다. ‘오라녜(oranje)’는 네덜란드어로 오렌지, 즉 주황색을 뜻하는 단어이자, 남프랑스의 지명이었다. 지도자의 가문 이름이 곧 색이름이었다. 빌럼 1세는 저항의 상징이 되었고 그의 이름은 곧 네덜란드 독립의 상징이 됐다. 

빌럼 1세는 1584년 암살로 생을 마쳤지만, 그의 저항은 80년 전쟁 끝에 독립으로 이어졌고 오라녜-나사우 가문은 네덜란드 왕실로 이어졌다. 네덜란드 국기에서 오렌지색은 오래전에 빠졌지만, 국민의 기억 속에서는 살아남았다. 국기에서 사라진 색이 오히려 사람들의 일상과 문화 속에서 더 강하게 살아남은 셈이다. 매년 4월 27일 국왕 생일을 기념하는 왕의 날(Koningsdag)이면 암스테르담 운하부터 소도시 골목까지 온 나라가 오렌지색으로 물든다.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와 오렌지색 옷과 장식을 두르고 축제를 벌인다. 축구 국가대표팀은 ‘오렌지 군단’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져 있으며 국제 대회가 열릴 때마다 경기장은 거대한 오렌지 물결로 뒤덮인다. 팬톤도, 디자이너도 개입하지 않았다. 역사가 먼저 색을 선택했고 그 색이 나라의 브랜드가 됐다. 브랜드는 때로 기획보다 기억 속에서 더 강하게 자리 잡는다. 네덜란드의 오렌지색은 바로 그런 사례다.

실용이 전설이 되다–산토리니

그리스 에게해의 섬 산토리니를 한 문장으로 묘사하라면 누구나 같은 답을 낸다. 새하얀 벽과 파란 돔 지붕. 이 조합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되는 도시 경관이다. 카페 인테리어에서, 호텔 로비에서, 심지어 아파트 모델하우스에서도 이 이미지를 빌려 쓴다. 그런데 산토리니 하면 떠오르는 그 파란 돔 지붕은 대표적으로 알려진 몇 개의 상징적 돔에서 비롯된 이미지다. 그리스정교회 예배당 지붕이다. 소수의 장면이 수백만 명의 기억 속에서 섬 전체의 이미지가 됐다. 이것이 이미지의 힘이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몇 개의 장면이 전체 풍경을 대신하기도 한다. 이 색은 처음부터 미학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산토리니의 흰 벽은 오래전부터 사용된 석회 도료에서 비롯됐다. 저렴하고 내구성이 뛰어나며 강한 햇볕을 반사해 건물을 시원하게 유지해 주는 실용적인 선택이었다. 파란 지붕은 그리스정교회 전통색이다. 미학이 아닌 실용, 전략이 아닌 전통. 이 두 가지가 오랜 세월 쌓이며 세계에서 가장 열망받는 경관이 됐다. 누구도 처음부터 이 섬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삶이 먼저였고 브랜드는 나중에 따라왔다. 지금은 건축 규제가 이 색을 지킨다. 신축 건물도 흰 벽을 따라야 하며 외벽 관리가 소홀하면 벌금이 부과된다. 절벽 위 호텔은 매일 아침 외벽을 다시 칠하는 작업을 일과처럼 반복한다. 색을 유지하는 일이 곧 관광 경쟁력을 유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맥도널드 같은 글로벌 프랜차이즈나 대형 호텔 체인도 섬의 경관을 훼손할 수 없어 입점이 제한된다. 거대한 자본보다 경관과 색을 우선하는 선택이다.

우연이 규제가 되고 규제가 브랜드가 되는 구조다. 가난한 어촌의 실용이 규제를 통해 보존되면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되는 경관이 됐다. 위대한 브랜드는 종종 생존의 흔적에서 태어난다.

지움으로써 얻다–교토와 마쓰모토

도시 컬러 브랜딩의 가장 역설적인 사례는 일본 교토다. 교토가 선택한 색은 ‘색이 없는 것’이다.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개발 압력이 높아지자, 2007년 교토시는 경관 조례를 제정했다. 건물 외벽 색상은 황적색 계열로 채도 6을 초과할 수 없고, 기와지붕은 그을린 은색, 옥외광고물도 엄격히 통제된다. 색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빼는 것으로 도시의 얼굴을 만들었다. 이는 브랜드 관점에서 보면 ‘가시성(visibility)’ 이 아니라 ‘일관성(consistency)’을 선택한전략이다. 이 규정 앞에서는 글로벌 브랜드도 예외가 없다. 빨간 바탕에 노란 로고로 세계 어디서나 눈에 띄는 맥도널드는 교토에서 간판 색을 갈색과 베이지로 바꿔야 입점할 수 있다. 스타벅스도, 세븐일레븐도 교토에서는 차분한 갈색 계열로 교체된다. 세계 어디서나 통하던 브랜드 컬러가 교토에서만큼은 통하지 않는다. 교토가 더 강한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같은 일본, 나가노현의 마쓰모토(松本)는 색으로 정체성을 만든 또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마쓰모토의 상징은 16세기 말 세워진 마쓰모토성이다. 검은 옻칠 외벽이 ‘까마귀 성(烏城)’이라는 별명을 낳았다. 상부의 흰 회벽과 하부의 검은 판벽이 이루는 흑백의 대비가 성의 미학이자, 정체성이다. 마쓰모토는 이 흑백 조화를 도시 경관 전반에 녹여냈다. 교토가 색을 억제해 고도의 품격을 지켰다면, 마쓰모토는 성의 색에서 출발해 도시 전체를 하나의 팔레트로 통일했다. 두 도시 모두 결론은 같다. 색을 통제하는 것이 가장 강력한 색이 된다. 교토에서 전통 가옥인 마치야(町家)는 재개발 건물보다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색을 제거하는 것이 경제적 자산이 된 셈이다.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소도시 이사말(Izamal)도 비슷한 경우다. 1500년대부터 지어진 스페인풍 건물이 노란색으로 채워져 ‘노란 도시’로 불리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어떤 색을 고수하느냐, 어떤 색을 걷어내느냐. 그 선택이 도시의 얼굴을 결정한다.

결국, 색이 남는다

호주 멜버른은 역사도, 전쟁도, 왕의 명령도 없이 색으로 도시 이미지를 바꾼 사례다. 2000년대 초 멜버른은 시드니에 가려 존재감이 희박한 도시였다. 시는 역동적인 ‘M’ 자 로고와 새로운 컬러 시스템을 도입했다.특정 단일 색을 고집하지 않고, 도시의 다양성과 활력을 표현하는 복합 컬러 팔레트를 구성해 공공시설, 교통, 행사 전반에 일관되게 적용했다. 이후 도시 브랜딩이 강화되면서 관광과 도시 인지도 지표가 상승했고, 같은 시기 멜버른의 경제지표 역시 개선됐다. 색을 설계하는 것이 도시 경쟁력을 설계하는 것과 같다는 증거다. 네덜란드의 오렌지는 전쟁터에서 왔고, 산토리니의 흰 벽은 가난한 어부의 실용에서 출발했으며, 교토의 절제된 경관은 천년 고도를 지키려는 의지에서 비롯됐다. 멜버른은 그 모든 것과 달리 처음부터 스스로 색을 설계했다. 기원도, 의도도, 방향도 전혀 다르다. 그러나 이들 도시는 같은 진실을 가리킨다. 색은 선택하는 순간이 아니라 지키는 과정에서 완성된다.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브랜드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다. 기업이 브랜드 컬러를 법으로 등록해 지키듯, 교토는 조례로 색을 관리하고, 산토리니는 벌금으로 색을 유지하며, 네덜란드는 국민의 기억으로 색을 전승하고, 멜버른은 디자인 시스템으로 색을 설계한다. 형태는 달라도, 본질은 하나다. 색을 지키는 것이 곧 브랜드를 지키는 것이다. 도시도, 국가도, 결국 브랜드다. 그리고 가장 오래 살아남는 브랜드는 시간을 견뎌낸 색 안에 살고 있다. 

황부영 브랜다임앤 파트너즈 대표 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