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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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의 거두 피터 드러커(Pe te r Drucker)는 격변의 시대를 통찰하며 짧지만, 강렬한 경고를 남겼다. ‘격변기에 가장 위험한 것은 격변 그 자체가 아니라, 어제의 논리로 행동하는 것이다.’ 거대한 성공은 대개 그 성공을 일구어낸 핵심 역량을 조직 문화로 고착시킨다. 문제는 시장 환경이 변했을 때다. 과거의 필승 공식은 변화를 가로막는 ‘핵심 경직성(core rigidity)’으로 돌변하며 결국 조직을 도태의 길로 이끈다.

과거 휴대폰 시장의 절대 강자였던 노키아는 애플의 스마트폰 혁신을 과소평가하고 기존 문법을 고수하다 몰락했다. 반면 삼성은 위기를 실존적 위협으로 인식하고 외부 협업과 다양한 해법을 동원해 파고를 넘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전자 산업의 지존이었던 소니 사례는 더욱 시사점이 크다. 노무라경제연구소는 소니의 실패를 ‘성공의 덫’에 빠진 전형적인 사례로 꼽는다. 아날로그 시대의 완벽주의, 즉 제품 출시 전 결함을 제로로 만드는 제조 역량이 디지털 시대의 핵심인 ‘속도와 유연성’ 앞에서는 오히려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됐다는 분석이다. 기업은 실패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성공을 너무 오래 믿기 때문에 망한다. 한때 시장을 읽어주던 안경이 환경 변화와 함께 눈을 가리는 안대로 변하는 순간, 몰락은 시작된다.

이병태 - 규제합리화 위원회 부위원장, 서울대 산업공학,
카이스트 경영과학 석사,
미 텍사스대 경영학 박사,
현 KAIST 경영대 명예교수
이병태 - 규제합리화 위원회 부위원장, 서울대 산업공학, 카이스트 경영과학 석사, 미 텍사스대 경영학 박사, 현 KAIST 경영대 명예교수

'한강의 기적'이라는 달콤한 함정

그렇다면 국가 경제는 어떠한가. 우리나라 역대 정부는 집권 때마다 ‘전략산업’을 선정하고 육성하는 데 국력을 집중해 왔다. 흥미로운 점은 그 대상이 언제나 첨단 기술 기반 제조업에 국한됐다는 사실이다. 언론과 국민의 관심 또한 반도체, 로봇, 이차전지, 인공지능(AI), 방산, 조선 등에 집중돼 있다. 중국의 기술 굴기를 위협으로 느끼며 제조업 초격차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은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담론이다.

첨단 제조업의 중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냉정하게 질문해야 한다. 제조업만 잘되면 우리 경제의 구조적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우리가 첨단 제조업에 집착하는 배경에 ‘한강의 기적’이라는 과거의 성공 신화가 덫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검증이 필요하다.

한국은 이미 제조업 중심 경제를 넘어선 탈산업화(post-industrialization) 사회다. 제조업 부가가치 비중은 2011년 이후 하락세에 접어들었고, 고용 비중 역시 1991년 24.3%에서 2025년 15.2%까지 축소됐다. 반면 서비스업 고용은 이미 70%를 넘어섰다.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다른 선진국보다 빠르게 하락하는 근본 원인은 여기에 있다. 경제활동인구 70%가 종사하는 서비스업의 생산성이 선진국 대비 약 50%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트렌드 역시 명확하다. 애플, 엔비디아, 브로드컴, 나이키, 퀄컴 등은 공장 없는 제조업, 즉 연구개발(R&D)과 마케팅, 서비스 모델에 집중하는 지식 집약 기업이다. 미국 정부가 강력한 리쇼어링 정책을 추진하고 있음에도 제조업 일자리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제이슨 퍼먼 하버드대 교수는 뉴욕타임스(NYT) 칼럼에서 “어떤 대통령도 제조업 일자리 부활을 성공시키지 못했다”고 단언했다. 제조업이 노동집약적산업에서 자본집약적산업, 다시 지식집약산업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고용 축소는 피할 수 없는 선진국형 현상이다.

인구 감소 공포와 데이터 진실

제조업 성공 신화와 함께 우리를 옭아매는 또 다른 덫은 ‘인구 보너스’에 대한 집착이다. 생산 가능 인구 감소가 시작되자, ‘국가 소멸’과 ‘지방 소멸’이라는 극단적인 경고가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과거의 논리로 미래를 재단하는 편견일 수 있다.

유럽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7개국 중 한국보다 인구가 많은 나라는 독일, 튀르키예,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5개국뿐이다. 나머지 22개국은 더 적은 인구로도 높은 삶의 질과 부를 유지하고 있다. 평균 인구수는 약 2090만 명으로 한국의 절반 수준이다. 특히 안도라, 모나코, 리히텐슈타인, 몰타 등 소국을 보자. 이들의 평균 인구수는 약 14만 명, 인구가 많은 몰타를 제외하면 평균 4만7000명 수준이다. 그러나 이들의 구매력 평가(PPP)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은 평균 13만8000달러(약 2억300만원)로, 우리의 세 배에 육박한다.

인구가 경제적 부의 절대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은 싱가포르나 대만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오히려 적정 규모의 인구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데 유리한 측면이 있다. 인구 감소를 곧 경제 붕괴로 연결 짓는 것은 과거 성장 공식에 매몰된 시각이다. 출산율 반등을 위해 막대한 재원을 쏟아붓고도 실패하는 이유는 정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미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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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의 경제'를 가로막는 반자본 정서와 규제

우리 경제의 진짜 문제는 제조업 위기나 인구 감소가 아니라,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대기업 고용 비중이 지나치게 낮다는 데 있다. OECD 국가 중 250인 이상 대형 사업장 고용 비중을 보면, 미국 58%, 프랑스 47%, 일본 41%인 반면, 한국은 고작 14%로 최하위 수준이다.

이 같은 영세화의 원인은 명확하다. 첫째,과도한 노동시장 규제가 기업으로 하여금 대규모 고용을 기피하게 한다. 둘째, 대기업은 규제와 통제의 대상으로, 자영업과 중소기업은 보호와 지원의 대상으로만 치부하는 비대칭 규제가 중견기업 성장을 가로막는 ‘피터팬신드롬’을 고착화했다. 셋째, 서비스산업의 기업화를 막는 낡은 규제다. 의료, 법률, 교육, 부동산 등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은 여전히 비영리 혹은 자본 지배 금지라는 쇠사슬에 묶여 산업화 길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R&D 투자는 생산성과 임금 상승의 핵심 동력이다. 선진국에서는 대기업과 혁신 기업이 R&D 투자 대부분을 담당한다. 그러나 한국은 영세 기업 중심 구조로 인해 생산성과 임금 격차 문제가 심화하고 있으며, 이는 교육 경쟁과 저출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성공의 공식을 파괴하라

우리는 지금 탈산업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여전히 제조업 중심과 인구 보너스라는 과거 논리에 머물러 있다. 과거의 성공이 오히려 미래를 가로막는 성공의 덫이 된 것이다.

이제는 과거의 성공 공식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서비스산업 기업화와 대형화를 가로막는 규제를 혁파하고, 자본과 기술이 결합해 새로운 고부가가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과거를 잊을 수 있는 용기만이 새로운 성장의 길을 열 수 있다. 

이병태 규제합리화 위원회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