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ARMY’라고 적힌 티셔츠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회색 바탕 위에 검은 글씨로 단정하게 인쇄된 그 티셔츠를 남학생이고 여학생이고 가리지 않고 입고 다녔다. 당시에는 그저 무심하고 깔끔한 디자인 정도로 생각했는데, 나중에야 그것이 미국 육군 티셔츠를 모방한 제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돌이켜보면 참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군대라는 가장 기능 중심적인 시스템에서 출발한 디자인이 어느 순간 아무런 위화감 없이 일상적인 패션으로 소비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군복에서 비롯된 디자인은 늘 우리 가까이에 있었다. MA-1 재킷, 카고 팬츠, 전투화, 카무플라주 패턴, 파일럿 선글라스 같은 것은 이미 패션 일부가 된 지 오래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어떤 목적 아래 만들어졌는지를 종종 잊고 살아간다. 프랑스 시각 연구자 마티유 니콜(Matthieu Nicol)의 사진책 ‘패션 아미(Fashion Army)’는 우리가 익숙하게 소비해 온 군복의 미학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책에서 그는 350여 점을 선별해 군복의 미학이 패션으로 스며드는 과정을 추적하고, 군복이 어떻게 하나의 상징적인 패션으로 진화했는지를 탐구한다.
이 사진은 전장과 일상적인 군 생활 모두를 위해 설계된 의복과 장비가 얼마나 치밀하게 개발됐는지를 보여주며, 패션·권력·미학 사이의 깊은 연관성을 드러낸다. 다양한 사진을 통해 이 책은 스타일과 혁신 그리고 군복이 패션과 정체성에 미친 광범위한 영향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며, 그 속에 있는 폭력의 기호를 비판적으로 질문한다.
패션 화보처럼 보이는 군 기록 사진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단순히 ‘군복이 패션에 영향을 주었다’는 익숙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패션 화보처럼 보이는 군 기록 사진을 통해, 기능과 미학이 원래부터 얼마나 가까운 관계였는지를 드러낸다. 무표정한 모델, 균일한 조명, 흐릿한 컬러 배경, 과장될 정도로 기능적인 섬세함은 1990년대 패션 혁신가 헬무트 랭이나 C.P. 컴퍼니의 룩북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패션 브랜드의 화보가 아니라 실제 군 연구 기관이 제작한 산업 사진이다.
그래서 책을 보다 보면 묘한 혼란이 생긴다. 어떤 사진은 지나치게 세련돼 보이고, 어떤 장비는 오히려 미래의 패션처럼 느껴진다. 산소 공급 장치가 달린 의복, 극한 환경을 위한 보호복, 텐트처럼 변형되는 아우터웨어, 얼굴 대부분을 가리는 장비는 생존을 위한 설계이면서 동시대 패션이 끊임없이 빌려온 미학이기도 하다. 이 책은 바로 그 경계가 얼마나 쉽게 흐려지고 뒤섞이는지를 보여준다.
책 디자인 역시 그런 인상을 더욱 강화한다. 납작한 페이퍼백 판형과 은은한 광택의 종이는 한편으로는 군 아카이브를 정리한 자료집처럼 느껴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패션 매거진이나 브랜드 카탈로그를 떠올리게 한다. 절제된 레이아웃과 건조한 타이포그래피, 스튜디오 조명 아래 기록된 이미지는 산업 문서와 패션 화보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는 듯한 감각을 갖게 한다. 그래서 책을 넘기다 보면 이것이 실제 군 기록 자료라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잊게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책은 기능과 미학, 기록과 스타일, 군 시스템과 패션 이미지 사이 경계가 얼마나 쉽게 뒤섞이고 흐려지는지를 보여준다.
‘패션 아미’는 이 사진을 하나의 사료로 대하거나 과학적이고 역사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각 사진 속 장비 용도나 세부 정보를 설명하는 것은 이 책의 목적이 아니다. 대신 작가는 아카이브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 저장소처럼 펼쳐 보여준다. 사진이 시각적 요소에 기반해 선택되고 편집됐기에, 이 책은 패션 화보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냉전 시대의 시각 문화에 대한 책이기도 하고, 산업 사진 아카이브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차갑고 건조한 이미지에서 이상할 정도로 동시대적인 감각이 새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