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화가의 어머니 초상(1888)' /사진 위키피디아
빈센트 반 고흐, '화가의 어머니 초상(1888)' /사진 위키피디아

5월이면 어버이날 카네이션 한 송이를 건네거나, 오랜만에 부모님에게 안부 전화를 한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은 끝내 입안에서만 맴돌다 사라질 때가 많다. 그리고 어느 날 그 기회마저 영영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뒤늦게 깨닫는다. 부모님의 얼굴이 가장 그리울 때는 곁에 있을 때가 아니라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뒤라는 사실을 말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된 빈센트 반 고흐(1853~90) 역시 그랬다. 1886년 봄, 그는 고향 네덜란드를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그것이 어머니와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몰랐다. 이후 반 고흐는 생을 마칠 때까지 어머니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반 고흐가 화가의 길로 나아가는 데 영향을 준 사람 가운데 한 명은 아마추어 화가였던 어머니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평생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아들을 걱정했다. 그런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그린 그의 그림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정철훈 - 미술 칼럼니스트, 고려대 문화콘텐츠학과 특임교수, 문화기획 프로듀서,
전 KBS아트비전 대표
정철훈 - 미술 칼럼니스트, 고려대 문화콘텐츠학과 특임교수, 문화기획 프로듀서, 전 KBS아트비전 대표

기억 속 어머니를 되살린 '화가의 어머니 초상'

1888년 9월, 프랑스 남부 아를에 머물던 반 고흐는 여동생 빌헬미나로부터 어머니의 흑백사진을 전달받았다. 폴 고갱이 아를에 오기 한 달 전이었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남겼다.

“나는 어머니의 초상화를 나를 위해 그리고 있어. 색도 없는 흑백사진을 도저히 그냥 볼 수가 없어. 기억 속에서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을 색채의 조화로 담아내고 싶어.”

흑백사진 속 어머니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반 고흐는 자기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되살리고 싶었다. 그는 선명한 초록색 배경 앞에 보닛(모자)을 쓴 어머니의 얼굴을 배치했다. 반 고흐는 분홍색으로 어머니 얼굴을 채웠고, 그 부드러운 분홍색이 초록색 배경과 대비를 이루며 시각적 조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반 고흐가 사용한 적색 물감이 퇴색했고, 지금 그의 어머니 얼굴은 다소 창백한 황록색 톤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어머니를 초상화 형식으로 그린 유일한 그림이다. 가족과 관계가 늘 원만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붓을 통해 어머니를 단정하고 품위 있는 인물로 표현했다. 자식을 향한 걱정과 자부심이 동시에 담긴 눈빛, 굳게 다문 입술에서는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이 느껴진다. 그것은 반 고흐가 기억하고 사랑했던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어린 시절 가족의 기억을 담은 '에텐 정원의 추억'

1888년 11월, 고갱이 아를의 노란 집에 머문 지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그는 반 고흐에게 실제 풍경 대신 기억과 상상으로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했다. 반 고흐는 어린 시절 살았던 에텐의 정원을 떠올렸다. 그곳은 어머니와 여동생이 거닐던 꽃밭이었다. 프랑스로 떠난 뒤 만나지 못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자연스럽게 그림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림을 완성한 뒤 그는 여동생 빌헬미나에게 편지를 썼다. “방금 에텐 정원의 추억을 담아 내 침실에 걸 그림을 완성했어. 이 두 여성을 너와 어머니라고 상상해 봐.”

이 작품은 고갱의 영향 아래 제작된 실험적 작품이다. 굵은 윤곽선으로 ‘색면’을 구획하는 클루아조니즘 기법이 화면 전반에 반영돼 있다. 그러나 화면을 소용돌이치듯 흐르는 역동적인 붓질과 강렬한 색채 표현은 여전히 반 고흐 특유의 감정을 드러낸다.

달리아와 제라늄이 가득한 정원 사이로 두 여성이 산책하고, 한쪽에서는 허리를 굽힌 여성이 꽃밭을 정리하고 있다. 검은 숄을 걸친 나이 든 여성은 어머니로, 빨간 양산을 든 젊은 여성은 여동생으로 추정된다.

반 고흐에게 기억에 의존해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순수한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했던 행복한 기억은 늘 꽃이 만발한 에텐 정원의 풍경으로 떠올랐다. 반 고흐도 편지에 “닮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이 그림이 그 분위기를 잘 나타낸다”라고 썼다. 

1 빈센트 반 고흐, '에텐 정원의 추억(1888)' 2 빈센트 반 고흐, '수염 없는 자화상(1889)' 3 빈센트 반 고흐, '장미(1890)' /사진 위키피디아
1 빈센트 반 고흐, '에텐 정원의 추억(1888)' 2 빈센트 반 고흐, '수염 없는 자화상(1889)' 3 빈센트 반 고흐, '장미(1890)' /사진 위키피디아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린 '수염 없는 자화상'

1889년 9월, 반 고흐는 그해 5월 8일부터 생폴드모졸 정신 요양원에 입원 중이었다. 그해는 어머니의 칠순 생일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생일 선물을 살 돈이 없었고, 직접 찾아갈 수도 없었다. 대신 거울 앞에 앉아 수염을 말끔히 깎고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반 고흐는 약 35점의 자화상을 남겼지만, 면도한 모습의 자신을 그린 작품은 이것이 유일하다. 회갈색 배경 앞의 얼굴은 따뜻한 온기를 띠고 있으며, 강렬한 눈빛과 굳게 다문 입술에서는 복잡한 내면과 절제된 감정이 동시에 느껴진다. 정신 요양원에서 그린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단정하고 건 강한 모습이다.

그는 칠순의 어머니가 자신을 걱정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건강하고 젊어 보이는 모습을 담아 어머니를 안심시키고자 했다. 이 자화상은 정신 요양원에서 아들이 어머니에게 보낼 수 있었던 가장 정성 어린 생일 선물이었다.

훗날 이 작품은 1998년 뉴욕 경매에서 7150만달러에 낙찰되며 당시 세계 경매가 순위 3위를 기록했다. 지금 환율로 약 1050억원, 물가 상승분을 반영한 실질 가치는 약 2100억원에 이른다. 어머니의 칠순 생일 선물로 그린 반 고흐의 자화상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생일 선물이 되었다.

가족이 만든 반 고흐의 신화

1890년 7월, 반 고흐는 서른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동생 테오는 형의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여섯 달 뒤 세상을 떠났다. 두 형제는 프랑스 오베르의 작은 공동묘지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반 고흐는 아버지와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끝내 가족을 사랑했다. 가족 역시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를 사랑했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기록에 따르면, 미술관이 소장한 ‘붓꽃’과 ‘장미’는 어머니가 190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헤이그 자택 현관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아들의 그림은 어머니가 눈을 감는 날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동생 테오는 평생 형에게 생활비를 보내며 그의 붓을 지켰다. 스물여덟의 제수씨 요한나는 어린 아들과 수많은 그림을 홀로 떠안은 채, 형제의 편지를 정리해 출판하며 반 고흐를 세상에 알렸다. 갓난아기였던 조카 빈센트는 훗날 반 고흐 재단을 설립하며 삼촌의 모든 그림을 세상에 기증했다. 

사랑하는 가족의 힘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반 고흐의 신화’ 역시 없었을지 모른다. 완벽하지 않아도, 늘 화목하지 않아도 가족은 서로를 버티게 한다. 5월 가정의 달, 반 고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가족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정철훈 미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