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문화·예술계에 조용한 ‘사건’ 하나가 터졌다.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열린 금기숙(74) 작가의 ‘패션 아트(fashion art)’ 기증 기념 특별전 ‘드리밍, 댄싱, 엔라이트닝(Dreaming, Dancing, Enlightening·꿈꾸고 춤추고 깨닫다)’이 90일간 113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모은 것이다. 이는 국내 최다 관람객을 동원한 단일 전시인 2007년 서울시립미술관 ‘불멸의 화가 반 고흐 전(이하 반 고흐 전·82만 명)’을 뛰어넘는 기록이다.
이번 전시는 금 작가가 작품과 아카이브 자료 총 56점을 서울공예박물관에 기증하면서 기획됐다. 작품 감정평가액만 13억1000만원에 이른다. 작년 말 개막한 전시는 소셜미디어(SNS)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연일 ‘오픈런(open run·점포나 전시장에 입장하기 위해 문이 열리기 전부터 줄을 서서 대기하는 현상)’ 행렬을 불러왔다. 지난 2월에는 방한한 잔자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영부인이 전시장을 찾아 “수공예적 노고와 아름다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극찬했다.
금 작가는 전 홍익대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 교수이자,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개회식에서 피켓 요원의 ‘눈꽃 요정’ 드레스를 만든 미술감독이었다.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아트 투 웨어(art to wear)’ 운동을 한국적 맥락으로 재해석해 패션 아트라는 독자적 장르를 개척한 1세대 선구자이기도 하다.
의상을 단순히 입는 대상이 아닌, 시대의 철학과 개인의 기억을 투영하는 ‘입는 조각(wearable art)’으로 확장한 그의 예술 세계는 어린 시절 감꽃을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던 손의 기억에서 출발했다. 이제 그 손은 철사와 구슬, 노방, 폐단추를 엮어내며 ‘관계와 조화’를 이야기한다. 그의 작품은 해외에서 먼저 주목받아, 세계 최대 규모 유람선 ‘얼루어 오브 더 시즈호’ 중정(中庭)에 35점이 전시돼 있다.
이번 전시의 유례없는 성공이 해외 거장과 블록버스터 전시 위주로 흘러가는 국내 주류 미술계에 던지는 메시지는 묵직하다. 일각에선 ‘대중이 직접 발굴하고 키워낸 전시’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코노미조선’은 서울 종로구 유금와당박물관에서 금 작가를 만나 소회를 나눴다. 이곳은 작가가 남편인 유창종 관장(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과 함께 수집한 와당(瓦當·지붕에 기와를 입혀 내려온 끝을 막는 건축재)을 전시하는 공간이자, 금 작가 작업실이 있는 곳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관람객 113만 명’은 국내는 물론 해외 미술계에서도 보기 어려운 기록이다. 소감이 어떤가.
“아직도 얼떨떨하고 믿기지 않는다. 패션 아트는 주류 미술계가 크게 주목하지 않던 분야인데, 나 같은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을 줄인 인터넷 은어) 작가’ 작품을 이렇게 많이 보러 와 주다니 놀라울 뿐이다(웃음). 특히 유치원생부터 어르신까지 전 세대가 어우러져 관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떤 이는 ‘매우 예뻐서 눈물이 난다’며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아마도 가장 접근하기 쉽고 친숙한 매체가 ‘옷’이기에 가능한 일 같다.”
작품을 조건 없이 기증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내 작품은 내가 평생 나눈 대화의 흔적이다. 즐거움과 자부심도 있지만, 시행착오로 인한 좌절의 기억도 담겨 있다. 1990년 종이 의상을 만든 후부터 패션 아트 작품을 이어 왔다. 기록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후학의 연구 기반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서울공예박물관과 좋은 인연이 닿았다.”
금 작가는 지난 2002년에도 유 관장과 함께 수십 년간 모아온 한·중·일 고대 와당 1873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바 있다. 해당 와당은 박물관 내 ‘유창종실’에서 상설 전시되고 있다.
전시에서 평창 동계 올림픽의 눈꽃 요정 의상도 볼 수 있었다. 당시 개·폐회식 미술감독으로서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하다.
“준비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자문단이 ‘개회식 피켓 요원 의상이 성공하면 그 올림픽은 성공한 것’이라 하더라. 사람들에게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움과 감동을 줄 디자인이 필요했다. 답은 패션 아트였다. 하얀 철사와 반짝이는 구슬을 엮어 ‘눈꽃’을 형상화하고, 한복의 풍성한 실루엣과 저고리의 깃, 족두리의 떨새 장식 등을 차용해 한국인의 생명력을 표현했다. 6개월간 91벌의 의상을 제작했고, 그중 한 벌은 스위스 로잔의 IOC 본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패션 아트가 세계 무대에서 국가적 문화 아이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순간이었다.”
철사에 구슬을 엮는 독보적인 ‘구슬망 기법’을 구축했다. 이 재료에 매료된 계기는.
“직조의 기본 재료인 실을 대신할 매개체로 철사와 구슬을 발견했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하게 굽어지는 철사를 이용해 선(線)을 만들고 구슬과 스팽글, 단추 등으로 촘촘히 엮으면, 조명에 따라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진다. 흔들리고 떨리는 요소를 통해 내가 가진 꿈과 희망, 깨달음의 과정을 나누고자 했다.”
비닐 빨대, 은박지도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내 영감의 원천은 일상과 주변 이야기에 있다. 1995년 무렵 정원에서 거미줄에 맺힌 물방울과 그 사이로 번지는 무지개를 보고 구슬 드레스를 만들어 밀레니얼 시대의 희망을 표현했다. 손자가 태어났을 때는 아이의 건강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로 색동저고리를 만들었다.
재료 역시 마찬가지다. 한복을 짓고 남은 자투리 노방 천, 버려진 빨대, 초콜릿 포장 은박지 등 주변의 버려진 것으로 작품을 만든다.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것에서 숨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새 생명을 불어넣는 것, 그것이 패션 아트가 동시대에 던지는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계획은.
“5월 4일 진주실크박물관에서 새로운 전시를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진주 특산품인 노방실크와 누에고치로 만든 신작을 선보였다. 해외에서도 전시 문의가 들어오고 있어 검토 중이다. 앞으로는 입체 작업뿐 아니라 드로잉 중심의 평면 작업도 늘려볼 생각이다. 물론 철사를 잇고 구슬을 꿰는 작업도 계속할 것이다. 아직 사둔 철사가 많이 남아 있다.(웃음)”
젊은 창작자에게 한말씀한다면.
“예술에는 정답이 없다. 무엇이든 과감하게 시도하고 그 안에서 재미를 찾다 보면 생각하지 못했던 더 좋은 방법이 툭 튀어나온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꾸준히 계속하는 것이다. 10년 이상 하면 길이 보인다.”
역대 국내외 주요 전시 관람객은
국내외 미술·공예 전시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흥행 기록을 살펴보면, 그 시대 대중의 미적 취향과 문화적 지형도가 드러난다. 국내 단일 전시 중 역대 1위는 2007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반 고흐 전’으로 100일간 82만 명을 동원했다. 해외 단일 전시 중 최다 관람객을 동원한 전시는 2019년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열린 ‘레오나르도 다빈치 서거 500주년 특별전’으로 4개월간 107만 명이 관람했다. 다만, 각 전시의 성격과 기간, 관람 방식(유·무료) 등이 달라 관람객 수만으로 순위를 매기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게 미술계의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