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슬 스튜어트 골프 링크스의 다채로운 풍경. /사진 LinksGage
캐슬 스튜어트 골프 링크스의 다채로운 풍경. /사진 LinksG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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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학수 스포츠전문 칼럼니스트 - 민학수의 올댓골프 대표, ‘골프룰 도대체 왜이래’ ‘골프를 찾아서’ 저자
민학수 스포츠전문 칼럼니스트 - 민학수의 올댓골프 대표, ‘골프룰 도대체 왜이래’ ‘골프를 찾아서’ 저자

낯선 새소리에 눈을 떴다. 낮고 깊은 울림이 있는 숲의 정령이 깨우는 듯한 이국적인지저귐이었다. 창문을 열자 스코틀랜드 하이랜드(Highland)의 투명하고 서늘한 새벽빛이 방 안 가득 밀려들었다. 불과 몇 시간 전, 거의 자정이 다 될 무렵 도착해 암흑 속에서 어렴풋이 거대한 실루엣만 보여주었던 건물은 아침 햇살 아래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본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사암과 오랜 세월을 버텨낸 담쟁이덩굴이 어우러진 이곳은 ‘컬로든 하우스(Culloden House)’다. 

드넓은 정원을 거닐며 스코틀랜드의 가장 깊은 심장부에 들어와 있음을 실감했다. 이곳은 1746년, 스코틀랜드의 독립과 명예를 걸고 잉글랜드 왕정에 맞섰던 하이랜드의 전사들, 즉 ‘자코바이트(Jacobites·국왕 제임스 복위파)’ 연합군이 마지막 피를 흘렸던 ‘컬로든 전투’의 사령부가 있던 역사적 현장이다. 하이랜드 민족의 처절한 실패와 슬픈 눈물이 고여 있는 이 고요한 저택에서 여정의 첫 아침을 맞이하는 것은 이번 스코틀랜드 골프 기행이 예사롭지 않은 여정이 될 것임을 예고하는 듯했다.

고개를 돌려 불과 하루 전의 타임라인을 복기해 본다. 인천국제공항을 떠나 하늘길에서 보낸 시간만 14시간 30분. 지루한 비행 끝에 영국 히스로국제공항에 닿았을 때 이미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하지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인버네스(Inverness)행 국내선 비행기로 환승했다. 북쪽으로 향하는 비행기 창밖을 내려다보며 묘한 긴장감이 차올랐다. 밤늦은 시각, 마침내 착륙한 인버네스국제공항은 호젓하다 못해 적막했다. 

활주로를 걸어 나와 차 문을 열었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훅 끼쳐오던 공기의 밀도가 전혀 달랐다. 온몸의 세포를 하나하나 깨우는 듯한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특유의 서늘하고 맑은 밤공기. 습기 하나 없이 팽팽하게 당겨진 그 청량한 공기는 장거리 비행의 피로를 단숨에 씻어내는 알싸한 청량제였다. 

타탄체크에 새겨진 상남자의 불굴의 유산

골퍼에게 스코틀랜드 하이랜드는 늘 경외와 동경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호기심의 대상이다. 지형적, 문화적으로 스코틀랜드는 남부의 완만하고 풍요로운 평야 지대인 ‘로랜드(Lowland)’와 북부의 거친 산악 지대인 ‘하이랜드’로 날카롭게 갈린다. 에든버러의 세련된 도심이나 골프의 성지 세인트앤드루스가 있는 로랜드가 부드러운 해안선이 있는 링크스의 모태가 되었다면, 하이랜드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거친 바위산, 사계절 내내 피어오르는 짙은 안개 그리고 북해에서 불어오는 맹렬한 바람이 지배하는 야생 그 자체의 땅이다. 이 차이는 스코틀랜드의 또 다른 축인 위스키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로랜드의 위스키가 부드럽고 화사하며 가벼운 꽃향기를 풍긴다면, 하이랜드의 싱글몰트는 척박한 땅에서 캐낸 피트(Peat·이탄) 향이 가득하고 묵직하며, 입안 가득 거친 풍미를 남긴다. 골프 역시 마찬가지다. 불규칙하게 솟구친 모래언덕과 무자비한 바람은 골퍼에게 요령이 아닌, 대자연의 날것 그대로와 맞서 싸우거나 혹은 철저히 순응할 것을 요구한다.

이 거칠고 웅장한 하이랜드의 중심이자 관문이 바로 인버네스다. 게일어로 ‘네스강(River Ness) 입구’라는 직관적인 이름의 도시는 오랜 세월 켈트족의 후예인 하이랜드 전사의 요새였다. 

인버네스를 떠올리면 누구나 어릴 적 한 번쯤 보았던 흑백사진 한 장을 기억할 것이다. 안개 자욱한 호수 위로 공룡을 닮은, 긴 목을 치켜든 괴생명체의 실루엣. 바로 ‘네스호의 괴물, 네시(Nessie)’다. 어린 시절 우리에게 인버네스와 네스호는 미지의 세계이자 지구상 최고의 미스터리가 펼쳐지는 무대였다. 이곳을 걷다 보면 스코틀랜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상징, 격자무늬 치마 형태의 전통 의상인 ‘킬트(Kilt)’와 그 고유의 패턴인 ‘타탄체크(Tartan)’의 묵직한 역사와도 마주하게 된다. 오늘날 패션 아이템으로 소비되는 타탄체크는 사실 하이랜드 가문(clan)의 가치관과 정체성이 새겨진 일종의 ‘가문 문장(emblem)’이다. 가문마다 고유의 색상과 선의 굵기, 배열을 달리하여 척박한 하이랜드 땅에서 서로의 결속을 다졌다. 

초기 하이랜드 전사의 킬트는 오늘날처럼 세련된 무릎길이 치마가 아니었다. 폭이 넓고 긴 타탄 담요를 허리에 감고 남은 부분을 어깨에 멜빵처럼 걸쳐 입는 격렬한 야생의 작업복이자 전투복이었다. 낮에는 비바람을 막아주는 옷이었고, 밤에는 거친 무어(Moor) 지대의 맨땅에서 몸을 덮고 잠드는 이불이 되었다. 잉글랜드 왕정은 컬로든 전투 이후 하이랜드인의 불굴의 저항 정신을 꺾기 위해 게일어 사용을 금지하고, 이 타탄체크 킬트를 입는 자를 사형이나 유배형에 처하는 잔혹한 문화 말살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인버네스 사람들은 이 무자비한 동화 정책 속에서도 자기들의 문양과 언어를 처절하게 지켜냈다. 이 황량하고도 쓸쓸한 하이랜드의 미학은 오래전부터 문학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자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다. 

스코틀랜드가 낳은 세계적인 문호 월터 스콧(Walter Scott) 경은 그의 명작 ’웨이벌리(Waverley)’와 의적 소설 ‘롭 로이(Rob Roy)’를 통해 하이랜드의 척박한 대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불굴의 정신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에든버러의 중심 기차역 이름이 왜 ‘웨이벌리역’이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대목이다. 

문득, 골퍼와 하이랜드 링크스의 관계도 이 문학적 서사와 너무나 닮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거친 페스큐 풀숲, 발을 딛는 것조차 두려운 항아리 벙커 그리고 사정없이 뺨을 때리는 북해의 칼바람 속으로 골퍼는 끊임없이 고통받고 좌절한다. 그러나 18홀을 마치고 돌아설 때면, 결국 자기 영혼이 이 황량한 대자연이 주는 웅장한 매혹에 철저히 굴복했음을 깨닫게 된다. 지독한 애증이자, 끊을 수 없는 매혹이다.

인버네스 성에서 바라본 시내 풍경. /사진 셔터스톡
인버네스 성에서 바라본 시내 풍경. /사진 셔터스톡

황금빛 가시 금작화와 백색 유람선의 조화

그 지독한 몰입의 첫 단추를 꿸 곳이 바로 이번 여행의 첫 무대, ‘캐슬 스튜어트(Castle Stuart·현 캐봇 하이랜드)’다. 자코바이트의 슬픈 역사를 품은 컬로든 하우스를 나서 차로 불과 20분을 달렸을 뿐인데, 창밖 풍경은 이내 거대한 북해의 모레이 퍼스(Moray Firth) 만으로 바뀐다. 때는 봄기운이 대지에 막 스며들기 시작하는 4월 말. 

골프장에 들어서자마자 압도적인 시각적 충격이 일어났다. 바다를 사이에 둔 양쪽 언덕이 온통 샛노란 가시 금작화(Gorse)로 뒤덮여 눈이 시릴 정도의 대향연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스코틀랜드 링크스의 봄을 알리는 이 황금빛 꽃길은 거친 북해의 칼바람 속에서도 이 땅이 품은 강인한 생명력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2009년 처음 문을 연 캐슬 스튜어트는 세계 골프계에 거대한 충격을 던진 곳이다.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스코틀랜드의 올드 링크스 사이에서, 현대 링크스 설계의 거장 길 한스(Gil Hanse)와 마크 파르시넨(Mark Parsinen)은 오직 자연의 지형만을 이용하여 ‘뉴 클래식’의 정수를 빚어냈다. 오픈하자마자 전 세계 골프 애호가를 단숨에 매료했고, 유서 깊은 ‘스코티시 오픈’을 수차례 개최하며 현대 링크스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걸작이다. 

바닷가 언덕 위에 당당하게 서 있는 클럽하우스는 무척 이색적이다. 스코틀랜드 전통의 무겁고 어두운 석조 건물 대신, 1930년대 호화 유람선을 모티브로 삼은 백색의 아르데코(Art Deco) 스타일 원형 건물이 이방인을 맞이한다. 매끄러운 곡선의 하얀 외벽과 탁 트인 전면 통유리창 너머로 푸른 바다와 고풍스러운 캐슬 스튜어트 성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민학수 스포츠전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