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문화인가, 아니면 비즈니스인가. 패션 미디어는 저널리즘인가, 엔터테인먼트인가, 혹은 시대의 욕망을 빠르게 포착하는 감각 산업인가. 이 모든 질문이 서로 충돌하는 대신 우아하게 공존할 수 있음을 증명한 왕국이 바로 정통 패션 매거진이었다. 그리고 그 눈부신 패션 킹덤의 중심에서 취향과 권력, 이미지와 산업의 질서를 설계해 온 절대군주가 애나 윈투어(Anna Wintour)였다. 최근 전 세계 극장가를 다시 한번 패션 런웨이로 만든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잘 알려져 있듯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런웨이’ 편집장 미란다의 실제 모델은 미국 ‘보그’의 전설적인 편집장 애나 윈투어다. 애나 윈투어는 2025년 6월 미국 ‘보그’ 편집장직을 내려놓고, 콘데나스트(Condé Nast·‘보그’ ‘GQ’ ‘배니티 피어’ 등을 보유한 미디어 그룹) 최고콘텐츠책임자이자, ‘보그’ 글로벌 에디토리얼 디렉터로 여전히 제국 최상층에서 패션 미디어의 방향을 지휘하고 있다.
2006년 개봉된 전편이 정통 패션지 편집장의 권력과 우아함 그리고 냉정한 패션 생태계를 신화처럼 각인시켰다면, 2026년의 속편은 달라진 미디어 환경 속에서도 그 신화는 계속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디지털 알고리즘이 트렌드를 지배하고, 소셜미디어 속 ‘마이크로 트렌드’가 밤사이 패션 하우스의 운명을 바꾸는 오늘날, 애나 윈투어의 존재감은 여전히 아이코닉하다. 모든 것이 빠르게 휘발되는 시대에도 변함없이 그녀는 단 1㎜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듯한 완벽한 보브컷과 샤넬 선글라스를 고수한 채 패션쇼 프런트 로(front row) 중심에 앉아 있다.
애나 윈투어의 시그니처는 명확하다. 완벽하게 정돈된 칼 단발의 보브컷, 얼굴 표정과 감정을 감추는 검은 선글라스, 유행을 초월하는 프린트 드레스, 몸에 맞춘 카디건, 재킷과 코트, 존재감 있는 디자이너 슈즈로, 그녀만의 패션 세계관을 구축해 왔다. 샤넬 트위드 셋업, 프라다 스커트와 카디건, 오스카 드 라렌타의 드레스, 마놀로 블라닉 슈즈 등 시그니처 아이템을 통해, 트렌드를 따르거나 앞서기보다 스타일을 권력의 언어로 번역한 아이콘이라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선글라스는 철저하게 계산된 프로페셔널리즘의 창조물이다. 애나 윈투어는 “선글라스는 내 감정을 숨겨주는 훌륭한 도구다. 내가 쇼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타인에게 들키지 않게 해준다. 그것이 나만의 영역을 지키는 방식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불변의 스타일은 패션계 일부로부터 ‘지루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매 시즌 누구보다 앞서 새로운 컬렉션을 마주하는 편집장이 정작 본인 실루엣에는 혁신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넘쳐나는 트렌드의 과포화 속에서 ‘나다운 것’을 수십 년간 유지하는 것만큼 강력한 스타일의 권위는 없을 것이다. ‘애나 윈투어 룩’이라는 레이블로, 유행에 휘둘리지 않는 절대적인 미적 기준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살아 있는 지표가 됐다. 여기에 애나 윈투어만의 차가운 애티튜드가 시그니처 룩의 강렬한 느낌표를 더했다. 전편 영화에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편집장 미란다처럼 누구나 긴장하고 얼어붙게 해, 애나 윈터(Winter)로 불리기도 했다.
동시에 그녀가 스타일 아이콘으로 패션계에 끼친 영향력은 독보적이다. 1988년 11월 미국 ‘보그’ 편집장 취임 후 첫 커버에서 모델 미카엘라 베르쿠에게 1만달러짜리 디올 재킷과 50달러짜리 게스 청바지를 믹스 매치해 입혔다. 이는 하이 패션과 스트리트 패션의 조화를 통해 현대 패션이 나아가야 할 ‘믹스 앤 매치(mix & mahch·상반된 스타일의 새 조합)’의 방향성을 제시한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또한 애나 윈투어는 젊은 천재를 발굴하는 안목이 있는 마에스트로였다. 존 갈리아노, 알렉산더 맥퀸, 마크 제이콥스, 톰 브라운에 이르기까지 현대 패션계를 이끄는 거장들 뒤에는 그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지지를 보낸 애나 윈투어의 심미안이 있었다.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회·보그(CFDA·Vogue) 패션 펀드’를 통해 신진 디자이너에게 데뷔의 문을 열어준 것은 애나 윈투어의 공로로 인정받고 있다. 무엇보다 매년 5월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열리는 ‘멧 갈라(Met Gala)’를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영향력 있는 패션 이벤트로 성장시키며 애나 윈투어 파워는 클라이맥스에 치달았다. 예술과 자본, 셀러브리티와 하이 패션을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결합해 내는 그녀의 기획력은 패션이 어떻게 하나의 거대한 대중문화 축제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그러나 2026년 현재, 그녀가 구축한 패션 제국은 거대한 자본의 거센 파도를 맞이하고 있다. 최근 열린 멧 갈라가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에게 1000만달러(약 150억원)의 메인 스폰서십을 넘겨준 사건은 패션계에 충격을 안겼다. 그간 하이 패션을 위협해 온 이커머스 독점 권력에게 패션계의 신성한 붉은 계단을 통째로 내주었다는 비판과 함께 ‘멧 갈라가 영혼을 억만장자에게 팔아 넘겼다’는 비난이 폭발했다. 이 불편한 비즈니스 관계에는 애나 윈투어 특유의 정치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녀는 일찍이 아마존의 막강한 자본력을 영입하기 위해, 제프 베이조스의 새 부인 로런 산체스를 ‘보그’ 커버에 앉히며 그들에게 문화적 신분을 부여하는 내러티브를 설계해 온 것으로 보인다. 거대 자본을 패션 시스템 내부로 흡수시키는 그녀의 행보는 패션이 냉철한 비즈니스가 되어가는 현실을 투영해 주는 듯하다.
이 사건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 속 사건과 묘한 기시감을 일으킨다. 까다롭고 냉혹할지언정 미학적 가치 앞에서는 타협하지 않던 ‘런웨이’ 편집장 미란다는 거대 테크 기업이나 글로벌 헤지펀드가 ‘런웨이’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하자, 또 다른 자본 시스템과 동맹을 맺는다. 영화 속에서 ‘런웨이’를 인수하는 사샤 바인스(루시 루 분)는 제프 베이조스의 전처 맥킨지 스콧을 연상케 한다. 영화와 현실이 다른 건, 영화 속 미란다는 맥킨지 스콧을 연상시키는 사샤 바인스를 ‘런웨이’ 커버에 등장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 애나 윈투어는 로런 산체스를 커버에 등장시켜 비난받았다.
역설적이게도 애나 윈투어는 스타일에선 불변을 고수했지만, 그녀가 지배하는 패션 생태계 내부에서는 시대와 자본의 역학 관계에 누구보다 기민하게 순응하며 진화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애나 윈투어라는 존재는 오늘날 하이 패션이 마주한 모든 모순과 혼돈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거대 자본과 디지털 권력이 하이 패션의 오랜 신성을 뒤흔드는 이 순간에도, 그녀의 보브 컷과 선글라스가 유지되는 것처럼 우리가 사랑한 패션의 본질만은 변치 않을 것이라는 맹목적인 위안. 그리고 그 안위의 대가로 하이 패션이 과연 어디까지 품위를 지키며 타협할 수있을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회의감. 그렇게 애나 윈투어라는 아이콘은 현대 하이 패션과 정통 패션지가 처한 냉혹한 현실과 마주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