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唐)나라 전기 재상을 세 번 지내면서 문단을 주도한 장열(張說·667~730)의 시 중에 ‘송왕준자우림부영창령(送王晙自羽林赴永昌令)’이라는 율시(律詩)가 있다. 궁성을 지키는 우림위(羽林衛)의 무장에서 영창 현령으로 발령받아 부임하는 왕준(王晙·?~732)을 전송한 작품이다.
“장군 별이 북쪽 낙수로 옮겨가니, 신령한 비는 동쪽 도성 낙양을 피해 간다. 굳센 창자의 영예를 짊어지기 위해, 또다시 강한 목이란 명성을 좇으려 한다. 흰 구름이 이궐을 향해 흘러갈 때, 누런 잎은 옛 곤명 연못 위에 흩어진다. 현악기 노래 들려주는 지방관이 고마우니, 북채로 북 치는 소리는 드물게 들리리라(將星移北洛, 神雨避東京. 爲負剛腸譽, 還追强項名. 白雲向伊闕, 黃葉散昆明. 多謝弦歌宰, 稀聞桴鼓聲).”
‘현가재(弦歌宰)’의 출처는 ‘논어(論語)’의 ‘양화(陽貨)’ 편이다.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현령으로 덕정을 베풀 때 공자(孔子)가 방문해서 현악기 연주에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었다고 적혀 있다. ‘강항(强項)’과 ‘부고성(桴鼓聲)’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후한 초기 도성인 낙양(洛陽)에서 호양공주(湖陽公主) 집의 창두(蒼頭·사내종)가 대낮에 사람을 죽였다. 그는 바로 공주의 집으로 숨어버려 관리들이 잡을 수 없었다. 어느 날 공주가 외출할 때 창두도 수레에 동승했다. 보고를 받고 하문정(夏門亭)에서 기다리던 낙양령 동선(董宣)이 수레를 가로막고 칼로 땅에 선을 그으며 못 가게 했다. 이어 큰소리로 살인범을 감싸는 공주의 잘못을 지적하고 창두를 수레에서 내리게 한 뒤 그 자리에서 쳐 죽였다. 공주는 바로 궁으로 달려가 동생인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에게 호소했다. 대로한 유수가 즉시 동선을 불러 매로 때려죽이려 했다. 동선이 머리를 조아리고 한마디만 하고 죽겠다며 말했다. “성덕(聖德)으로 나라를 일으키신 폐하께서 양민을 살해한 종을 내버려두시면 장차 어찌 천하를 다스리시렵니까? 매도 필요 없으니, 신이 스스로 죽겠습니다.” 말이 끝나자, 그는 바로 기둥에 머리를 처박았다. 유수는 내시로 하여금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동선을 붙잡게 한 다음 공주에게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라고 명했다. 말을 듣지 않는 동선의 머리를 억지로 숙이게 하려 했으나 동선은 두 팔로 땅을 짚고 버티면서 끝내 목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황제도 어쩔 수 없이 동선을 ‘강한 목의 수령(强項令)’이라면서 내보냈다. 그 뒤 황제가 내린 30만전을 동선은 모두 수하 관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로부터 그가 위세를 부리며 불법을 자행하는 호족들을 척결하자, 모두 놀라서 떨었다. 도성 사람들은 그를 ‘와호(臥虎·누운 호랑이)’라 부르며 이렇게 노래했다. “북채로 북도 울리지 않게 하는 동소평이라네(枹鼓不鳴董少平).” 관청 앞의 북을 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이 동선의 재임 동안에는 없었다는 말이다. ‘포(枹)’는 ‘부(桴)’와 같고, ‘소평’은 동선의 자(字)다.
앞서 동선이 북해상(北海相)으로 부임했을 때, 지역의 호족 공손단(公孫丹)이 새집을 지으면서 아들에게 길 가는 사람을 죽여 그 시신을 집 안에 두게 한 일이 있었다. 그렇게 하면 액땜을 할 수 있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이를 안 동선은 즉시 그 부자를 붙잡아 처형했다. 그러자 그 일족 30여 명이 무기를 들고 관청으로 달려와 억울함을 호소하며 소란을 피웠다. 동선은 과거 역적 왕망(王莽)에게 부역한 바 있는 그 일당이 해적과 내통할 것을 우려해 전부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수구잠(水丘岑)에게 명해 모두 처형했다. 소식을 접한 상급의 청주(靑州) 장관이 조정에 보고하고, 동선은 사법 수장 정위(廷尉) 앞으로 불려 가 심문받았다. 그에게 사형선고가 떨어졌지만, 아침저녁으로 시를 읊으며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처형 때가 가까워져 옥리가 음식을 가져오자, 그가 크게 소리쳤다. “난 평생 남의 밥을 얻어먹은 적이 없는데 죽을 때 먹겠느냐!” 그는 다른 사형수들과 함께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갔다. 그때 황제의 특명이 전해져 도로 감옥에 수감됐다. 재심 과정에서 그는 상급자의 지시에 따른 수구잠은 죄가 없으므로 살려주고 자기를 죽여 달라고 했다. 황제는 둘 다 사면하고 다시 관직에 나아가도록 윤허했다.
그 뒤 강하(江夏)에서 사나운 도적 떼가 들끓자, 황제는 특별히 동선을 태수로 보냈다. 임지에 도착한 동선은 바로 도적들에게 귀순하라는 격문을 보냈다. “본 태수가 간악한 도적들을 잘 잡기 때문에 조정에서 특별히 이곳으로 보냈다. 지금 군사를 대기시켜 놓았으니, 격문을 보고 자신의 안전을 잘 생각하기를 바란다.” 격문을 본 도적들이 즉시 귀순했다. 동선은 낙양령으로 재임 중이던 74세에 죽었다. 황제가 보낸 사신은 처자의 곡소리 속에서 관도 없이 천에 덮여 있는 시신만 볼 수 있었다. 집에는 보리 몇 말과 낡은 수레 한 대 말고 다른 재산이 없었다. 보고를 받은 황제가 슬퍼하며 말했다. “동선의 청렴결백을 죽어서야 알게 됐구나(董宣廉潔, 死乃知之)!”
이상의 행적은 ‘후한서(後漢書)’의 ‘혹리열전(酷吏列傳)’ 맨 앞에 보인다. 후한의 혹리 중에는 왕길(王吉)과 같은 부류도 있다.
굳세고 올발라서 악을 미워한 양구
권세 있는 환관 왕보(王甫)의 양자인 왕길은 명예욕이 강하고 성격은 잔인했다. 양부의 덕으로 20세에 패상(沛相·패국 지역의 행정 책임자)이 되자 사나운 관리들만 뽑아서 범법자 소탕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아이를 낳고 기르지 않는 부모가 있으면 모두 참수해 가시나무와 함께 파묻었다. 중죄인은 처형한 뒤 수레에 시신을 올리고 난도질해서 관내 각지를 돌게 했다. 이 밖에도 처참하고 악독한 일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저질러 주민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이렇게 5년 동안 1만 명이 넘는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그도 양부와 함께 양구(陽球)에게 붙잡혀 낙양의 감옥에서 죽었다.
후한 후기의 대표적 혹리로 꼽히는 양구는 소년 시절 무술을 배우고 성격이 모질어 신불해(申不害)와 한비(韓非)의 법가 사상을 좋아했다. 고을에 그 어머니를 모욕한 관리가 있었다. 그는 수십 명의 소년을 모은 뒤 관리의 집으로 몰려가 관리를 죽이고 그 집안을 도륙했다. 이로써 이름이 알려지고 그 뒤 벼슬에 나아가 고당령(高唐令)이 됐다. 그러나 지나치게 가혹한 그가 자주 문제를 일으키자, 군수가 잡아들였다가 곧 방면했다.
구강(九江)의 산적이 횡행할 때 조정에서 수단이 뛰어난 그를 태수로 보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산적 토벌에 성공하고, 관내의 간악한 관리들을 색출해 모두 죽였다.
조정에서 왕보와 조절(曹節) 등 환관이 득세하여 권력을 휘두르는 상황을 보고 양구는 분연히 말했다. “내가 사례교위(司隸校尉)를 맡으면 저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그 뒤 그는 과연 사례교위로 임명됐다.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그는 왕보 등 여러 환관과 각지의 수령으로서 비리를 일삼는 그 자제들을 모두 멸족하고, 이에 아부해 부귀를 누리는 장군 출신의 태위(太尉) 단경(段熲)도 함께 처형하겠다고 아뢰었다. 황제의 윤허가 떨어지자, 그는 즉시 이들을 모두 붙잡아 낙양의 감옥에 가두었다. 그중에는 왕보의 양자 왕길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매를 맞아 죽고 단경도 자살했다.
양구는 이어서 조절을 처치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조절은 여러 환관과 함께 황제 앞에 나아가 호소했다. “양구는 잔혹하고 포악한 관리로, 과거 면직된 바 있으나 구강에서의 작은 공로로 다시 발탁됐습니다. 허물이 있는 자가 함부로 못된 짓을 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그 말에 황제는 양구에게 궁궐을 호위하는 위위(衛尉)로 옮기도록 명했다. 양구는 황제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신은 맑고 높은 덕행이 없음에도 은혜를 입어 매와 개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왕보와 단경을 주살했지만, 아직 여우가 남아 있으니, 신에게 한 달만 여유를 주시면 못된 무리가 죗값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바닥을 찧은 그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그렇게 세 차례나 간청했지만 황제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해 겨울 양구는 사도(司徒) 유합(劉郃) 등 여러 사람과 장양(張讓)과 조절 등 환관을 주살하려고 모의하다가 발각돼 처형당했다.
청(淸) 중기의 조익(趙翼)은 ‘해여총고(陔餘叢考)’에서 이렇게 말했다. “환관 왕보 등을 주살하겠다고 아뢴 양구는 굳세고 올발라서 악을 미워함에 권세 있는 자를 피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고(李固), 두교(杜喬) 등과 같은 열전에 실어야 하는데, 혹리 속에 두어도 되는가?”
이 동선과 양구처럼 고대의 혹리 중에는 권력자의 주구(走狗) 노릇 하던 당(唐)의 내준신(來俊臣) 등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 예가 적지 않다. 그래서 조익도 이들을 보통의 혹리로만 볼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이에 대해 ‘후한서’의 저자 범엽(范曄)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혹리 중에는 강한 세력을 쳐부수고 지위 높은 자들을 꺾기 위해 머리가 깨져도 돌보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 또한 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