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면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모처럼 한잔할까 싶어 와인 코너로 향할 때가 있다. 하지만 매대에 즐비하게 늘어선 와인 병을 보면 당혹감이 먼저 몰려온다. 수백 가지나 되는 와인 중에 무엇을 골라야 할지 난감해서다. 레이블을 읽어 봐도 알 길이 없다. 영어도 쉽지 않은데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언어도 다양하다.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너무 싼 것은 불안하고, 비싼 것은 부담스럽다. 이럴 때 혹시 ‘그냥 맥주나 마시자’면서 돌아서지는 않는가. 그럴 필요 없다. 와인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몇 가지 기준만 익혀 두면 2만~3만원대로도 얼마든지 만족스러운 와인을 찾을 수 있다.
와인을 고르는 기본 원칙
우선 무엇과 먹을지를 먼저 정하자. 와인은 음식과 즐기는 술이다. 흔히 ‘생선에는 화이트 와인, 고기에는 레드 와인’이라고들 하지만, 무조건 그 규칙을 따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레드 와인을 해산물에 곁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레드 와인의 타닌이 해산물의 불포화지방산과 만나면 비린내를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반면 타닌이 없는 화이트 와인이나 스파클링 와인은 다양한 요리와 무난하게 어우러진다. 특히 기포가 있는 스파클링은 맥주와 즐기는 음식이라면 무엇이든 다 잘 맞는다. 단, 비린내가 심한 젓갈이나 건어물은 와인의 과일 향과 부딪히므로 피하는 것이 좋다.
음식이 정해지면 화이트·레드·스파클링와인 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결정이 났을 것이다. 이제 레이블에 적힌 산지명을 보자. 프랑스보다는 보르도(Bordeaux), 이탈리아보다는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처럼 구체적인 산지명이 적힌 와인이 개성이 뚜렷한 경우가 많다. 생산 지역이 좁아질수록 규정이 더 엄격해지고, 그만큼 지역 고유의 특성이 잘 반영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빈티지를 확인할 차례다. 와인은 묵힐수록 맛있다는 말도 있지만, 그건 고가의 프리미엄 와인에 한해서다. 2만~3만원대 와인은 장기 숙성보다 어릴 때 즐기도록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싱그러운 맛이 생명인 화이트 와인은 2023년 이후 빈티지를, 타닌이 숙성될 시간이 필요한 레드 와인은 2021~2023년산을 추천한다. 스파클링 와인 중에는 빈티지 대신 NV가 적힌 것이 많다. 이는 ‘Non-Vintage’라는 뜻으로 여러 해의 와인을 블렌딩해서 스타일의 일관성을 유지했다는 의미다. 품질이 낮은 것이 아니니 안심하고 선택해도 된다. 알코올도 살펴보자. 알코올 함량은 와인의 무게감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대체로 도수가 낮을수록 경쾌하고 높을수록 농밀하다.
여기까지 확인했으면 이제 당신 앞에는 두세 가지 와인이 선택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들어 비비노(Vivino) 같은 앱에서 소비자의 평가를 보자. 이때 평점만 보지 말고 평가자가 몇 명인지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10명이 4.5점을 준 것보다 1만 명이 4.1점을 준 와인이 더 안전한 선택이다. 참고로 1000명 이상의 평점이 3.7 이상이면 괜찮은 품질, 4.0 이상이면 뛰어난 품질로 볼 수 있다. 챗GPT 같은 인공지능(AI)을 활용하면 와인의 특징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므로 내 취향에 맞는 것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믿고 마시는 품종과 산지
와인 선택법을 익혀도 매대 앞에 서면 여전히 선택지가 너무 많다는 느낌이 들 수 있다. 이럴 땐 유명한 품종과 산지를 기준으로 압축하면 고르기가 한결 쉬워진다. 화이트 와인부터 전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품종과 산지를 알아보자. 상큼한 스타일이라면 뉴질랜드의 말보로(Marlborough)에서 생산된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이 대표적이다. 산미가 높고 허브 향이 산뜻해 샐러드, 나물, 부추전처럼 채소 향이 살아 있는 메뉴와 궁합이 좋다. 어떤 음식과도 무난하게 잘 맞는 와인을 찾는다면 이탈리아의 델레 베네치에(Delle Venezie)나 프리울리(Friuli)에서 생산된 피노 그리지오(Pinot Grigio)를 추천한다. 더 풍부한 아로마와 질감을 원한다면 캘리포니아산 샤르도네(Chardonnay)도 좋다. 보디감이 묵직해서 가벼운 해산물보다 육류와 더 잘 어울린다.
프랑스 남부 코트 뒤 론(Côte du Rhône)의 레드 와인은 적당한 무게감과 은은한 향신료 풍미가 특징이다. 다양한 육류 요리와 두루 잘 맞고 질감이 부드러워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 않는 편이다. 스페인의 리오하(Rioja)에서 생산되는 크리안자(Crianza) 등급의 레드 와인은 잘 익은 붉은 과실과 오크 향의 조화가 매력적이다. 직화구이 고기와 즐기면 음식의 불맛과 와인의 훈연 향이 자연스럽게 겹친다. 갈비찜이나 스테이크처럼 묵직한 고기 요리에 곁들일 와인으로는 아르헨티나 멘도자(Mendoza)의 말벡(Malbec)이 제격이다. 벨벳 같은 타닌이 육즙을 감싸고 농익은 과일 향이 짭조름한 양념의 감칠맛을 한층 끌어올린다.
2만~3만원대 스파클링 와인으로는 스페인의 카바(Cava) 또는 이탈리아의 프로세코(Prosecco)나 모스카토 다스티(Moscato d’Asti)를 추천한다. 카바는 다양한 음식과 잘 어울리며 기포가 섬세하고 아로마가 은은해 담백한 해산물과 함께하기 좋다. 청량함이 돋보이는 프로세코는 치킨처럼 튀긴 요리와 즐기면 상큼한 산미가 기름진 맛을 개운하게 정리해 준다. 모스카토 다스티는 알코올 도수가 낮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매운 음식에 곁들이면 와인의 달콤함이 입맛을 부드럽게 달래주고, 짜장면이나 탕수육처럼 단맛이 많은 음식과도 의외의 궁합을 보여준다.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건 값비싼 와인이 아니라 오늘의 식탁과 잘 맞는 한 병이다. 와인을 고르는 일은 자기 취향을 조금씩 알아가는 즐거운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