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0일 밤, 삼성전자 노사가 임금 협상 잠정 합의안에 서명했다. 핵심은 단순한 보너스 인상이 아니다. 기존 초과 이익 성과급(OPI) 상한을 유지하는 대신 별도의 ‘특별 경영 성과급’을 향후 10년간 신설하기로 한 점이다. 재원은 노사가 합의한 사업 성과의 10.5%로 잡았고, 지급 상한은 두지 않았다, 지급 방식은 전액 자사주(self-acquired stock) 지급이다. 2026~2028년에는 반도체(DS) 부문 영업이익 200조원, 2029~2035년에는 100조원을 넘어야 한다는 기준까지 명문화했다.
합의의 당부(當否)는 잠시 미뤄두자. 본고가 주목하는 바는 한국 노동시장에 도래한구조적 신호다. 첫째는 대기업 보상 체계가 현금 임금의 경계를 넘어 자본 영역(자사주)으로 외연을 확장했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이 새로운 분배 체계가 인공지능(AI) 인프라 관련 핵심 인력이라는 극소수 노동자층에 국한돼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글로벌 학계와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제기해 온 거시적 난제, 즉 ‘AI가 노동의 몫을 깎아내고 자본의 몫을 키운다면, 그 분배를 어떻게 다시 짤 것인가’라는 화두가 한국의 노사 협상 테이블 위에서 ‘자본소득의 노동 이전’이라는 형태로 선제적으로 실현된 셈이다.
새로운 분배 실험이 시작됐지만, 동시에 AI 인프라 바깥의 다수 노동자를 분배 외곽으로 밀어내며 노동시장 내부의 또 다른 계급화를 심화시키는 이면이 있다.
안톤 코리넥(A. Korinek)과 리 록우드(L. Lockwood)는 전미경제연구소(NBER) 연구 보고서 ‘AI 시대의 공공 재정(2026.1, 브루킹스연구소 동시 발간)’에서 AI가 현대 조세 체계의 두 기둥인 노동소득세와 소비세를 두 단계에 걸쳐 무너뜨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1단계는 AI가 사람 일자리를 광범위하게 대체하는 국면이다. 자본이 노동을 대체할수록 생산의 결실은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아니라 AI와 인프라를 소유한 자본가에게 돌아간다. 근로소득세와 사회보장 기여금에 기대 온 국가 재정의 한 축이 이때 흔들린다.
자연스러운 대응은 소비세 확대다. 일자리가 사라져도 사람은 여전히 무언가를 사기때문이다.
그러나 이 처방의 유효기간은 길지 않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은 소득 대부분을 생활비로 쓰지만, 늘어난 자본 수익을 가져가는 자본가는 그 일부만 소비하고 나머지는 재투자한다. 부(富)가 노동에서 자본으로 옮겨갈수록 시장의 소비지출로 흘러나오는 비중은 줄어든다. 게다가 같은 시간에 정부는 일자리를 잃은 이들에게 현금과 재교육, 복지를 제공해야 한다. 소비세 기반은 좁아지고 복지 지출 부담은 커진다.
2단계는 한층 까다롭다. 저자들이 ‘인공 일반 지능 중심 경제(AGI-centered econo-my)’라 부르는 국면이다. 자율적인 AI 시스템이 인간을 위한 재화를 만드는 데서 멈추지 않고, 더 강력한 인프라를 짓기 위해 데이터센터와 컴퓨팅 자원, 전력을 스스로 소비하기 시작한다. 경제에서 생산된 가치 상당 부분이 인간의 식탁이 아니라 ‘AI 자본의 자기 증식’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의미다. 이때 인간이 소비하는 영역에 매기는 세금만으로는 국가를 굴릴 수 없다. 남는 선택지는 자본 자체에 세금을 매기는 길뿐이다.
‘자본 자체에 대한 과세(capital taxation)’ 는 우리에게 익숙한 세금과 결이 다르다. 소득세·부가가치세·법인세는 무언가 ‘움직이고 흘러갈 때’ 매기는 세금이다. 반면 자본세는 ‘쌓여 있는 자산’ 자체에 매년 일정 비율을 거둔다. 종합부동산세나 일부 국가의 부유세(wealth tax)가 이런 구조에 해당한다. AGI 중심 경제에서는 이 과세 대상이 AI 시스템, 데이터센터, 컴퓨팅 인프라 같은 거대 자본 스톡으로 확장한다.
두 사람은 이 자본세를 ‘최적 수확(optimal harvesting)’ 문제로 비유한다. AGI 중심 경제를 자율적으로 자라는 거대한 숲에 빗댄 것이다. 숲은 내버려두면 스스로 우거진다. 그러나 인간 사회가 생존하려면 매년 일정한 나무를 베어 와야 한다. 너무 많이 베면 숲이 황폐해져 다음 해 수확이 없어지고, 너무 적게 베면 숲은 무성한데 사람은 굶는다. 그 균형점, 곧 AI 자본에 매기는 최적 세율은 인간 사회가 미래의 한 푼을 오늘의 한 푼보다 얼마나 덜 가치 있게 여기는지에 수렴하며, 두 사람의 모델에서는 연간 약 4% 수준이다.
AI 자본 가치 가운데 매년 4% 정도를 베어 인간 사회로 환원하는 것이 인류와 AI 경제가 공존하는 균형점이라는 뜻이다.
세원이 무너지는 순서가 정해지면 대응 순서도 정해진다. 1차 대안은 소비세, 2차는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 같은 시장 독점이 만들어 내는 초과이윤(super-normal rent) 과세, 마지막이 자본 자체에 대한 과세다. 저자들은 한 줄을 덧붙인다. 로봇세·컴퓨팅세·토큰세 같은 잔기술보다 국부펀드나 ‘보편적 기본 자본(Universal Basic Capital)’처럼 AI가 만들어 내는 부의 지분을 사회가 함께 나눠 갖는 방식이 더 안정적인 통로라는 것이다.
다만 이 처방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전제가 깔려 있다. 수확할 숲이 자기 나라 영토에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코리넥과 록우드 모델은 AI 자본을 보유한 국가가 그 자본에 직접 세금을 매기는 상황을 가정한다. 미국에서 이 처방이 성립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글로벌 시가총액 상위 10개 기업 대부분이 미국 기업이고, 지난 3년간 글로벌 주식시장 수익률 상당 부분이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MS), 알파벳, 메타 그리고 상장을 준비 중인 오픈AI·앤트로픽 같은 소수 기업군에서 나왔다. 미국 정부는 자국 영토에서 자가 증식하는 숲에 도끼를 댈 수 있다.
다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남는다. 한국 정부가 엔비디아 시가총액에, MS의 데이터센터 가치에 직접 자본세를 매길 방법은 사실상 없다. 거대 테크 기업이 이익을 저세율 관할지로 옮기는 데 능숙하다는 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디지털세 협상의 더딘 진척까지 고려하면 국제 공조를 통한 우회로마저 좁다. 한국 기업이 AI 자본의 본류에 얼마나 가까이 서 있든, AI 시대 조세 처방의 가장 강력한 도구가 한국에는 애초에 ‘도구함’에서부터 빠져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비대칭이 다음 질문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한국 가계는 글로벌 AI 자본 성장에 어떻게 닿을 것인가. 그리고 한국 정부는 그 성장 위에서 어떻게 세원을 확보해 사회로 재분배할 것인가가 바로 그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