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모두에 걸쳐 '논어'의 영향 속에서 창업을 이룩한 인물이 있었다. 조조가 그러했고 태종이 그러했으며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있었고 우리에게 이병철이 있었다. /사진 셔터스톡
한·중·일 모두에 걸쳐 '논어'의 영향 속에서 창업을 이룩한 인물이 있었다. 조조가 그러했고 태종이 그러했으며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있었고 우리에게 이병철이 있었다. /사진 셔터스톡
“‘논어(論語)’를 절반만 제대로 파악해도 천하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반부논어치천하(半部論語治天下), 논어가 어떤 책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이 말은 송나라 태조와 태종 2대에 걸쳐 재상을 지낸 조보(趙普·922~992년)의 말이다. 조보는 송 태조 조광윤을 도와 300년 송나라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다. 20년 동안 논어를 공부한 입장에서 보면 조보의 이 말은 논어에 담긴 뜻을 제대로 파악했음을 알 수 있다. 논어는 흔히 생각하듯이 도덕에 관한 케케묵은 이야기가 아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제왕학의 지혜를 온전하게 담고 있다. 그간 경전과 역사 공부를 통해 볼 때 논어를 제대로 파악해 현실 정치에서 성공을 거둔 인물은 중국에서 조조, 조선에서 태종 이방원이 두드러진다. 조조와 태종 모두 논어에 담긴 지인지감(知人之鑑)을 철저하게 체화했다. 정약용은 ‘논어고금주’에서 이를 관인지법(觀人之法)이라고 불렀다. 조조는 적기에 논어 구절을 인용했고 특히 사람을 판단할 때 논어를 응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9년 원소와 관도대전을 앞두고서 여러 장수가 (원소를) 상대할 수 없다고 말하자 조조가 말한다. “내가 소(紹)의 사람됨을 아는데 뜻은 큰데 지략이 모자라고 ‘외모는 장엄한데 담력은 모자라며(色厲而膽薄·색려이담박)’ 질투심은 많은데 위엄은 적으며 병사는 많은데 역할 분담이 분명치 못하고 장수는 교만해 정령(政令)이 통일되지 않으며 토지는 넓고 양식도 비록 풍부하지만, 결국 우리를 위해 바치게 될 것이다.” 사람을 꿰뚫어 보면서 논어 양화(陽貨)편에 나오는 공자 말, “외모는 장엄한데 내면은 유약하다”는 ‘색려이내임(色厲而內荏)’을 살짝 바꿔서 응용한 것이다.
이한우 - 논어등반학교장, 사마천 사기 번역, 반고 한서 번역, '이한우의 논어강의' 저자
이한우 - 논어등반학교장, 사마천 사기 번역, 반고 한서 번역, '이한우의 논어강의' 저자

조조부터 이병철까지, 능력 중심의 용인술 

조조가 인재를 쓸 때 집안 배경이나 신분이 아니라 재주만 보았던 것 또한 논어가 가르치는 인재관이다. 옹야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색깔이 곱지 않은 소의 새끼라 해도 털이 붉고 뿔이 제대로 났다면 비록 (사람이) 희생 제물로 쓰지 않으려 한다 해도 산천(의 귀신)이 그냥 버려두겠는가.” 이는 아버지가 문제가 있어도 그 아들 본인이 덕망과 재주를 갖췄다면 얼마든지 중용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이는 고스란히 삼성그룹 창업자 호암 이병철 회장이 보여준 인재관과 직결된다. 주희에 의해 선비의 마음 수양서 정도로 격하되기 이전 고대 중국에서 논어는 주역과 더불어 강명한 군주와 충직한 신하가 조화를 이루는 통치 제도에 관한 책이었다. 조선 태종 또한 스스로 굳세고 눈 밝은 강명한 군주이고자 했고 신하를 충직, 그중에서도 곧음이라는 잣대 하나로 판별해 적재적소에 썼다. 먼저 가장 좋은 쪽부터 살펴보면 순직(純直)이나 강직(剛直)이라고 할 수 있다. 경직(勁直)이라는 말도 썼는데 강직, 즉 굳세고 곧음과 같은 말이다. 순직이란 마음속에 간사함이 조금도 섞이지 않고 순전히 곧다는 뜻이다. 태종 18년(1418년) 7월 6일 태종은 육대언을 불러 새로 세자에 오른 충녕에게 전위할 뜻을 전하며 세자 성품에 대해 순직하다며 나라를 맡길 만하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공직(公直)이 있다. 공평·정직하다는 말이다. 태종은 조영무를 가리켜 공직하다고 했다. 이는 마음가짐과 언행 모두에 해당하는 말이다. 조영무에 대해 태종은 또 질직(質直)하다고도 했다. 말 그대로 바탕이 곧다는 뜻이다. 충직은 대체로 좌의정 박은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는 자칫 임금 뜻에만 맞추는 유형으로 비칠 수도 있다. 순직은 조정 관리에 관해 쓰지않았고 예를 들면 환관을 고를 때 척도로 삼았다. 곧음의 맨 끝에 광직(狂直)이 있다. 이숙번이 바로 그런 경우다. 그 또한 내침을 당하기는 했지만, 직 하나를 잃지 않았기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그다음은 부직(不直)이다. 이런 사람은 애초에 쓰지 않았고 썼다가도 부직함이 드러나면 곧바로 폐출됐다. 이상은 모두 태종이 스스로 논어에서 곧음의 중요성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조보가 말한 뜻이 어느 정도 이해됐으리라 믿는다.

이병철과 논어

돌이켜 보면 필자에게 논어라는 외길을 걷게 한 결정적인 순간은 2000년대 초에 읽은 이 회장의 ‘호암자전’에 나오는 다음 구절 때문이었다. “가장 감명을 받은 책 혹은 좌우에 두는 책을 들라면 서슴지 않고 논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라는 인간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바로 이 논어다. 나의 생각이나 생활이 논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만족한다.” 한마디로 큰 충격이었다. 당시 이 회장의 이 말을 듣고 ‘도대체 논어의 어떤 면이 이런 깊은 영향을 줬을까’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든 생각이 이것이다. ‘혹시 이 회장이 공부한 논어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철학 운운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책이 아닐까.’ 그 후 2007년부터 2012년까지 본격적으로 논어를 파고든 결과 이 회장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되기 시작했다. 특히 논어가 리더십에 관한 책이라는 것을 발견, 아니 재발견하고 나서는 더 뚜렷하게 이해됐다. 왜 재발견이냐면 이미 주희 이전까지 논어는 이미 리더십에 관한 책으로 널리 읽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필자는 진수(陳壽)의 삼국지 번역을 끝마쳤다. 리더십 공부를 위해 우선 조조, 유비, 손권 파트를 옮기고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세 영웅 모두 논어에 정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 영웅의 논어 사용법은 성격 그대로였다. 앞서 본 것처럼 조조는 논어에 담긴 지인지감을 잘 활용하고 있었다. 실전형이었다. 유비는 그와 달리 논어에 나오는 인자 혹은 군자의 모습을 잘 체현하고 있었다. 수양형이었다. 손권은 말로는 논어나 유가의 가치를 달고 살면서도 실제로는구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식형 혹은 과시형이었다. 이와 달리 이 회장은 실천형과 수양형을 겸비했다고 할 수 있다. 조조의 면모와 유비의 면모를 함께 갖췄던 것이다. 그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통찰이 호암자전에 나온다. 요즘 필자가 읽고 또 읽으며 새기는 대목이다. “논어에는 내적 규범이 담겨 있다. 간결한 말 속에 사상과 체험이 응축돼 있어 인간이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데 불가결한 마음가짐을 알려준다. 법률과는 대극의 위치에 있다. 법도 인간 사회의 불가결한 규범이기는 하나 이미 발생한 인간의 행위밖에 다루지 못한다. 어떤 행위가 발생한 연후에 작용하는 것이 법이다. 행위가 발생하기 이전에는 법은 아무 상관이 없다. 남을 기만하거나 살상하거나 혹은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가 있고 그것이 발각돼야만 비로소 작용하는 것이 법이다. 이와 같은 인간 사회의 규율에 적대하는 행위의 발생을 막는 것이야말로 개개인의 내적 규범인 것이다. 내적 규범을 상실한 인간, 즉 무규범 인간이 늘어나는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될까? 함부로 법률만 발동되고 죄인만 늘어난다. 그 결과 사람들 사이에는 불신감이 쌓이고 연대감이 희박해져 나약한 사회로 전락하고 만다.”

호암자전에 담긴 이병철의 논어 공부

이 회장은 다섯 살부터 조부가 세운 문산정에서 한문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한문 공부는 ‘천자문’부터 시작했는데 흔히 두서너 달이면 뗀다는 천자문에 나는 1년 남짓 걸렸다. 그래도 5년 가까운 서당 공부에 보람이 있이 통감이나 논어도 통독할 수 있었다.” 여기서 명확하게 콕 집어 논어를 언급한 것은 그만큼 영향력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이 회장은 스무 살 때인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와세다대 정경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대학을 중퇴하고 1931년 9월 귀국했다. 이 무렵 당연히 이 회장은 일본의 논어 연구 성과를 접했을 것이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논어 해석에 일가견이 있었다. 이미 17세기를 전후해 오규 소라이의 ‘논어징(論語徵’)과 이토 진사이의 ‘논어고의(論語古義)’가 나왔다. 이들은 주자학적 해석을 비판하고 원래 공자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을 내세웠다. 그리고 지금은 일본 만엔 화폐의 주인공인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자신의 실업계 투신 이후의 경험을 논어와 결부 지어 쓴 논어와 주판이 1927년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에서 시부사와는 기업가란 개인의 영리 추구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사회적 기여와 공익도 함께 추구해야 함을 분명히 했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소인의 경영이 아니라 군자의 경영을 말하는 것이다. 당연히 청년 이병철도 1929년 일본에 도착해 이 책을 읽었을 것이다. 또한 시부사와가 말한 청부(淸富)의 개념도 깊이 음미했을 것이다. 이처럼 한·중·일 모두에 걸쳐 논어의 영향 속에서 창업을 이룩한 인물이 있었다. 조조가 그러했고 태종이 그러했으며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있었고 다시 우리에게 이병철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논어에 힘입어 빛을 발휘했고 그럼으로써 논어라는 책을 빛나게 해줬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