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생태계에서 당연시했던 견고한 성벽이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다. 마케팅과 영업 부서 없이 잘 돌아가는 조직이 생겨나고 있다. 자동차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꾼 테슬라는 전통적인 광고나 거대한 마케팅 조직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신 제품의 혁신성, 최고경영자(CEO)의 강력한 개인 브랜드 활용, 고객의 디지털 경험, 소셜미디어(SNS) 바이럴과 고객 추천 시스템을 마케팅 메커니즘으로 전환했다.
글로벌 B2B(기업 간 거래) 소프트웨어 기업 아틀라시안(Atlassian)은 한때 ‘우리는 영업사원을 두지 않는다’는 철학으로 주목받았다. 무료 사용과 온라인 다운로드를 기반으로 한 제품 주도 성장(PLG·Prod-uct-Led Growth)과 개발자 커뮤니티 추천을 전면에 내세우며 성장해 왔다. 작은 자율 조직과 협업 중심의 의사 결정으로 유명한 스웨덴 글로벌 음원 스트리밍 기업 스포티파이(Spotify)의 사례도 유사하다. 이들이 마케팅·영업 부서를 대폭 축소하거나 없앤 이유는 명확하다. 해당 기능이 불필요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기능이 제품과 서비스, 비즈니스 모델 자체 안으로 깊숙이 스며들어(embedded) 분리할 수 없는 상태가 됐기 때문이다. 물리적 부서의 존재감이 없거나 최소 기능만 남았지만, 오히려 구성원 모두가 마케팅과 영업을 고민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경영자에게 매우 시대적이고 본질적인 질문 하나를 던져볼 수 있다. ‘귀사의 인사부는 반드시 지금과 같은 형태로 존재해야 하는가?’ 더 나아가, ‘HR(인사관리)의 기능(function)은 반드시 HR이라는 부서(form) 안에서만 존재해야 하는가?’
HR 독점의 역설
많은 전문가는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 맞춰 HR이 어떤 새로운 역할과 책임을 맡아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현업의 전략적 파트너(HRBP·Human Resource Business Partner)로 변신할 수 있을지 수없이 논해왔다. 이러한 담론은 언제나 ‘인사부 조직의 존속’을 당연한 전제로 진행됐기에 본질적 체질 개선에 한계를 드러냈다.
서구의 HR 시스템이나 프로그램을 정답처럼 받아들여 온 국내 기업 환경에서는 시행착오가 더 많이 반복됐다. 현장을 들여다보면, 인사부라는 독립된 조직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현업 리더의 인사관리 책임을 약화하는 경향이 있다.
핵심 인재 이탈, 저성과자 관리, 조직 문화 갈등, 보상 문제 등이 발생하면 현업 리더는 종종 인사부의 제도와 시스템을 문제 삼는다. 모든 과정의 최종 수비수가 ‘HR 부서’라는 특정 조직으로 인식되는 순간, 현업 리더는 인사관리에 대한 오너십을 무의식적으로 내려놓게 된다.
경영진 역시 조직 문제의 본질을 각 조직 리더의 리더십과 인사관리 역량에서 찾기보다 HR 부서의 정책과 시스템 문제 중심으로 접근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인사부의 존재로 기업 전체의 조직 관리 역량이 상향 평준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업 리더의 책임감과 인사이트가 약화되는 ‘HR 독점의 역설’이 발생하는 이유다.
해체와 내재화, HR 기능의 민주화
지금 우리에겐 ‘HR 기능의 민주화’가 필요해 보인다. HR 조직의 고도화가 아니라, 작은 HR 조직으로 그 실체는 점진적으로 가벼워지고, 핵심 기능을 현업 리더와 조직 운영의 일상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는 작업이다.
최고의 HR 전략은 인사부의 지속적인 개입 없이도 조직 스스로 HR 이슈를 고민하고, 학습하며, 성장하는 ‘자율 면역 시스템’ 을 구축하는 데 있다. ‘HR 조직의 제거’가 아니라 ‘HR 기능의 재배치’다.
미래 경쟁력은 부서의 크기가 아니라 모든 리더가 얼마나 HR적 사고를 깊이 내재화하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실험과 전환을 시도하기에 매우 유리한 시대의 한복판에 서 있다. 디지털 전환(DX) 시대를 넘어 인공지능(AI) 증강 인사관리(AI-augmented HRM) 시대가 열리면서, 과거 인사부의 전유물로 여겼던 많은 기능이 데이터와 플랫폼, AI 기술을 기반으로 현업 리더의 손안으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화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거창한 개편이나 HR 부서의 급진적 축소를 먼저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인사관리의 일부 권한과 책임을 현업 리더에게 점진적으로 이양하는 작은 실험이 중요하다. 인재 선발 인터뷰의 주도권을 현업 리더에게 더 많이 부여하거나, 팀 단위의 실시간 피드백과 성장 코칭 시스템을 강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필자가 이전에 시도했던 비즈니스 리더와 월 단위로 진행하는 ‘HR 위원회’ 같은 미팅도 의미 있다. 기업 현장의 인력과 조직 관리 이슈를 현장 리더가 주도해 논의하고 인사부가 핵심 전문성을 지원하는 체제다. 인사의 주도권을 인사부만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현업 리더와 구성원 모두가 함께 활용할 수 있도록 재배치하는 것이 핵심이다.
작아진 인사부, 그러나 강화된 기능
HR 분야의 세계적 석학 데이비드 울리치 미국 미시간대 교수는 “만약 HR이 기업의 가치 창출에 기여하지 못한 채 과거의 형태에 머무르려 한다면 차라리 없애버리는 편이 낫다”고 했다.
HR 존재에 대한 논쟁은 지난 한 세대 이상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 그 논쟁의 초점을 단순히 HR의 역할과 책임, 혹은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 철학의 문제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미래 조직이 당장 ‘부서 없는 조직’으로 급전환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경계(boundary)가 약한 조직’ 으로 먼저 이동할 것이다. 인사와 조직 관리 역시 직책 중심에서 직무 중심을 거쳐, 지금 프로젝트와 태스크 중심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모양새다. HR 기능 역시 현업 리더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마케팅은 제품 경험 속으로, 영업은 커뮤니티와 데이터 속으로, 구성원의 교육 훈련은 업무 현장의 흐름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앞으로 강한 조직은 기능을 중앙에서 독점하는 조직이 아니라, 기능을 조직 전체에 확산시키는 조직이 될 가능성이 크다. AI 전환(AX) 시대의 핵심 질문은 더 이상 ‘HR 부서를 유지할 것인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진짜 질문은 ‘모든 리더가 HR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일 것이다. 미래 조직의 경쟁력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리더의 답변 수준에서 결정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