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장의 품격은 의외로 티박스가 아닌 연습장에서 먼저 결정된다. 클럽하우스로 향하는 길목에서 마주한 캐슬 스튜어트(현재 명칭 캐봇 하이랜드)의 드라이빙 레인지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웬만한 메이저 프로 대회장에서도 보기 드물 만큼 완벽하게 관리된 장대한 천연 잔디 연습장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매일 좁은 그물망 닭장이나 딱딱한 고무 매트 위에서 앞 팀의 드라이버 소리를 소음 삼아 벽을 보고 공을 때려야 하는 한국의 골퍼에게 이곳은 비현실적인 해방감을 선사한다. 연습장에서 고개를 들면, 바다 건너편 양쪽 언덕을 샛노랗게 물들인 가시금작화(Gorse)의 황금빛 물결이 눈앞을 물들인다. 푸른 북해의 모레이 퍼스 만을 향해 막힘없이 날아가는 공의 궤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씻겨 나갔다.
페어웨이와 똑같은 수준의 잔디 위에 공을 올려두고 샷을 점검하는 이 사치스러운 시간. 정교하게 조성된 벙커와 실제 그린 스피드를 그대로 재현한 쇼트게임 연습장까지 둘러보고 나니, 라운드하지 않고 이곳에서 온종일 연습만 하라고 해도 전혀 지겹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 좋은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바다가 빚어낸 땅, 링크스의 진짜 어원
이 아름다운 코스를 마주하면 지형적으로묘한 의문이 고개를 든다. 보통의 올드 링크스가 거대한 모래언덕(사구)이 무자비하게 솟구쳐 코스 레이아웃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거친 형상이라면, 이곳은 바다를 옆에 낀 평탄한 해안선 코스에 가깝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사구가 플레이를 노골적으로 방해하지 않는 듯한 이 부드러운 지형을 두고 과연 링크스라 부를 수 있을까. 미국의 페블비치 골프 링크스처럼 이름만 링크스인 ‘시사이드(seaside) 코스’는 아닐까.
그 의문은 링크스의 진짜 정의를 되짚어볼 때 풀린다. 흔히 국내외 골프 서적에서는 ‘링크스(links)’를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link) 땅이라며 시적으로 풀이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철자가 같은 데서 오는 오해일 뿐이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OED)에 따르면, 링크스의 진짜 뿌리는 ‘굽이치는 언덕이나 경사지’를 뜻하는 고대 영어 ‘흘린크(hlinc)’ 다. 즉, 골프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바람과 파도가 빚어낸 ‘해안의 굴곡진 모래 지형’ 그 자체를 가리키던 지질학적 용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미국의 페블비치는 이름은 링크스지만 실제로는 태평양 해안 절벽의 단단한 육지 흙과 바위를 깎아 만든 시사이드 코스의 정수다. 반면 이곳은 겉보기엔 평탄해 보여도 발밑에는 수천 년간 북해의 바람과 파도가 밀어 올린 순수한 해안 퇴적 모래(hlinc)와 페스큐 잔디가 흐르는 뼛속까지 진짜 링크스다.
바다와 '밀당하는' 절묘한 입체적 라우팅
거장 길 한스와 마크 파르시넨이 완성한 이 코스의 천재성은 바다를 품에 안고 밀고당기는 절묘한 라우팅(routing)에서 폭발한다. 코스는 골퍼를 바다 바로 앞까지 끌어내렸다가 다시 언덕 위로 밀어 올리며 끊임없이 시야를 바꿔 놓는다.
클럽하우스를 나선 전반 1번 홀부터 3번 홀까지는 그야말로 파도가 그린 바로 밑까지 들이치는 듯한 해안선 최하단을 따라 나란히 달린다. 북해 한가운데 서서 샷을 날리는 듯한 극적인 현장감에 압도당한다. 그러다 4번 홀부터는 한층 높은 언덕 위(upper tier)로 서서히 올라가 바다를 거시적으로 조망하게 한다. 지형의 높낮이를 이용해 골퍼에게 끊임없이 시각적 쾌감을 주는 영리한 구성이다. 이 밀당은 후반에 다시 한 번 반복된다. 9번 홀을 마치고 돌아서면 10번 홀부터 12번 홀까지 다시 한 번 바다와 가장 가깝게 맞닿은 아래쪽 해안선으로 내려앉아 북해의 칼바람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그러나 이 부드러운 해안선 풍경에 속아 긴장을 푸는 순간, 코스는 무자비한 본색을 드러낸다. 티박스에서 바라보는 페어웨이는 넓고 만만해 보이지만, 막상 그린을 공략하기 위해 세컨드 샷 지점에 서면 ‘최적의 앵글’은 오직 한 군데뿐임을 깨닫게 된다. 조금이라도 티샷이 밀리면 깊은 벙커를 넘겨야 하거나 경사면과 마주하게 되는 고도의 전략적 변별력을 숨겨두었다. 처음엔 쉬워 보이지만 라운드가 깊어질수록 날카로운 본색을 드러내는 명설계다.
대회의 영혼 구하고, 미컬슨을 단련시키다
이 코스가 개장한 지 불과 2년 만인 2011년, 유럽프로골프투어의 핵심 메이저 대회인 ‘스코티시 오픈’ 개최지로 선정된 것은 필연이었다. 당시 BBC 스포츠와 외신은 “그동안 내륙 코스에 갇혀 정체성을 잃어가던 스코티시 오픈이 진짜 링크스의 혈통을 만나 대회의 영혼을 구원받았다(saved the soul)”고 일제히 타전했다. 디 오픈을 앞두고 북해의 진짜 바람과 단단한 모래땅을 경험하려는 미국의 정상급 스타들이 대거 하이랜드로 날아오기 시작한 계기였다.
이곳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서사를 쓴 인물은 필 미컬슨이다. 그는 2013년 이곳에서 열린 스코티시 오픈에서 우승한 바로 다음 주에 디 오픈까지 석권하며 골프 역사에 남을 대기록을 세웠다. 미컬슨은 인터뷰에서 “내가 디 오픈에서 우승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전주에 캐슬 스튜어트에서 완벽한 링크스 적응 훈련을 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지나치게 가혹해서 골퍼를 좌절시키는 올드 코스와 달리, 적당히 관대하면서도 링크스 고유의 바람과 정교한 앵글 플레이를 완벽하게 시험하는 가장 현대적이고 위대한 코스라는 극찬이었다.
캐디 이언과 'ABFU' 그리고 캐봇의 도약
이 거칠고 매혹적인 대장정을 함께한 캐디 이언은 코스 가이드이자, 훌륭한 말동무가 돼 주었다. 어느 홀에선가 기분 좋은 버디를 낚은 후, 고무된 마음으로 들어선 다음 홀에서 그만 어처구니없는 티샷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아쉬움 가득한 한숨을 쉬며 “한국에선 이걸 ‘버디값 한다’고 부른다. 버디를 하고 나면 꼭 다음 홀에서 망가지는 징크스가 있다”고 설명했다.
내 말을 들은 이언이 웃으며 스코틀랜드식 위트가 가득 섞인 문장으로 맞받아쳤다. “여기 스코틀랜드에도 똑같은 말이 있다. 우리는 그걸 ‘ABFU’라고 부르지.” 그가 알려준 단어의 뜻을 듣고 그만 징크스의 우울함도 잊은 채 포복절도하고 말았다. ‘After Birdie, Fucked Up’. 버디를 하고 난 바로 다음 홀을 보기 좋게 망쳐버렸다는 전 세계 골퍼의 애환이 담긴 만국 공통의 유쾌한 비속어 격언이었다.
캐슬 스튜어트는 이제 새로운 도약을 맞이하고 있다. 2022년, 세계적인 골프 리조트 그룹인 캐봇(The Cabot Collection)이 이곳을 인수하며 명칭을 ‘캐봇 하이랜드’로 바꾸었다. 그리고 2019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원년 설계자 마크 파르시넨의 못다 이룬 36홀 마스터플랜을 완성하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현대 골프 설계의 또 다른 거장 톰 도크(Tom Doak)에게 마이크를 넘겨 제2 코스인 ‘올드 페티 코스(Old Petty Course)’를 2026년 추가로 빚어냈다. 한 부지 안에서 길 한스와 톰 도크라는 당대 최고 거장의 예술성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꿈의 공간이 하이랜드에 완성된 것이다.
비록 스코어 카드는 요동치고 손끝은 긴장감으로 떨렸을지언정, 대자연에 순응하며 샛노란 가시금작화 사이를 걷는 이 여정은 지독한 애증이자, 끊을 수 없는 매혹 그 자체였다. 최고 수준의 링크스를 온몸으로 경험하고 나왔다는 깊은 포만감을 안은 채, 클럽하우스의 백색 원형 통유리창 너머로 저물어가는 북해의 붉은 석양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