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은 우리를 조종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이미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조용히, 그러나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을 뿐이다. /사진 셔터스톡
알고리즘은 우리를 조종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이미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조용히, 그러나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을 뿐이다. /사진 셔터스톡

퇴근 후 소파에 앉아 TV를 켠다. 처음엔 유튜브 동영상을 잠깐만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캠핑, 오지 생존 콘텐츠, 종합 격투기(MMA), 범죄 다큐를 멍하니 보고 있다. 처음엔 ‘내가 왜 이런 걸 보고 있지?’ 싶다가도 어느 순간 ‘내가 원래 이런 취향이었나?’ 생각하게 된다. 아내는 곁을 지나가면서 묻는다. “당신 취향도 아닌 걸 뭘 그리 몰입해서 보는 거야?”

사람들은 알고리즘이 우리를 너무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내 마음을 읽는다’는 표현도 한다. 정말 그럴까? 현실은 조금 다르다. 알고리즘이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이 아니다. 알고리즘이 우리 마음의 오래된 심리 구조와 생물학적 취약성을 정교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지만, 조금씩 그들에 의해 편집된 취향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김진국 - 문화평론가, 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김진국 - 문화평론가, 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내 안의 낯선 그림자, 무의식이 보내는 신호

이 현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 마음속의 그림자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융 심리학은 인간 안에 ‘그림자’가 있다고 보았다. 흔히 그림자를 악한 충동이나 억압된 욕망 정도로 이해하지만 실제 의미는 훨씬 넓다. 그림자는 내가 의식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가능성 전체를 포함한다. 공격성뿐 아니라 자유에 대한 갈망, 야성, 창조성, 모험심, 숨겨진 자신감까지도 그림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평소 온화하고 규범적인 사람이 거친 격투기나 범죄 액션 영상에 끌리고, 철저히 계획적인 사람이 무계획의 차박 유튜브를 탐닉하는 일이 생긴다. 지나치게 통제된 삶은 무의식 속에서 종종 반대 방향의 에너지를 찾는다. 반면 지나치게 안정적인 삶은 위험을 동경하고, 지나치게 이성적인 삶은 감정의 격렬함을 그리워한다. 인간 정신은 늘 균형을 향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흔한 오해 하나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폭력적 콘텐츠는 억눌린 감정을 해소해 준다’는 단순한 믿음이다. 과거 심리학계에는 공격성을 간접 배출하면 정서가 정화된다는 카타르시스 이론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스트레스 완화 효과가 나타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공격성을 강화하거나 폭력에 둔감하게 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콘텐츠 자체보다 그것이 개인 심리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느냐다.

안전한 위협과 인지적 구두쇠

사람들이 공포 영화, 롤러코스터, 익스트림 스포츠에 끌리는 이유를 설명하는 ‘안전한 위협’ 개념은 여기서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인간은 위험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안전한 상황에서 묘한 쾌감을 경험한다. 긴장은 올라가지만 실제 상처는 입지 않는다. MMA 경기나 생존 콘텐츠 역시 누군가에게는 현실에서 표현하지 못한 긴장과 에너지를 안전하게 간접경험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현대인의 디지털 중독은 그림자 이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더 강력한 배경에는 인간 뇌의 구조적 특징이 있다. 행동경제학과 인지과학은 인간을 완벽하게 합리적인 존재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을 가능한 한 적은 에너지로 뭔가를 판단하려는 존재로 본다. 인간의 뇌는 몸무게의 약 2%에 불과하지만 에너지의 약 20%를 소비한다. 그래서 복잡한 사고를 줄이고 익숙한 패턴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를 ‘인지적 구두쇠’라고 부른다.

행동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 사고를 두 가지 체계로 설명한다. 빠르고 자동적인 시스템 1과 느리고 숙고적인 시스템 2가 그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플랫폼이 거의 완벽하게 시스템 1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다. 쇼츠와 릴스는 사용자가 멈춰 생각할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영상 하나가 끝나면 즉시 다음 자극이 등장한다. 손가락 한 번이면 또 다른 콘텐츠가 이어진다. 핵심은 콘텐츠의 질보다 ‘멈춤의 비용’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이제 그만 볼까?’라는 결정을 내리는 데많은 정신 에너지를 쓴다. 반면 계속 넘기는 행위는 거의 자동 반응이다. 그래서 우리는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에너지를 절약하려는 뇌의 기본 성향 때문에 플랫폼 에 오래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현대인의 집중력은 금붕어보다 짧다’고 한다. 과장된 말이다. 집중력이 사라진 게 아니다. 집중하는 방식이 변한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몇 시간씩 드라마를 몰아보고 게임에 몰입한다. 다만 짧고 강한 자극에 익숙해지면서 긴 독서와 깊은 사유에 더 큰 노력이 필요해졌을 뿐이다.

알고리즘이 빚어낸 나의 취향

이제 조금 더 불편한 질문을 한 번 해보자. ‘내가 좋아한다고 믿는 것은 정말 내 취향일까?’ 과거의 확증 편향은 내가 믿고 싶은 정보만 선택하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알고리즘 시대에는 방향이 거꾸로 흐르기도 한다. 시스템은 사용자의 클릭 횟수, 체류 시간, 반복적인 시청 패턴을 학습하고 그 결과를 다시 사용자에게 되돌려 준다. 실제 플랫폼 실험에서는 특정 주제 영상에 단 몇 초 더 머무는 것만으로 피드 전체가 급격히 편향되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관찰되었다.

문제는 인간이 반복 노출에 취약하다는 점이다. 심리학은 반복적으로 접한 대상에 친숙함과 호감을 느끼는 경향을 ‘단순 노출 효과’라고 설명한다. 처음엔 우연히 눌렀던 캠핑 영상 몇 개가 어느새 텐트, 차박, 생존 장비 콘텐츠로 피드를 채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마음속에서 미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내가 사실은 자연을 좋아했던 사람인가 보다.’ 여기서 인지 부조화가 작동한다.인간은 자기 행동과 생각이 충돌할 때 심리적 불편함을 느낀다. 매일 캠핑 영상을 보면서도 ‘난 캠핑 싫어’라고 믿는 일은 불편하다. 결국 뇌는 행동에 맞게 생각을 수정한다.

취향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재구성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완전히 무력한 피해자는 아니다. 알고리즘은 우리를 학습하지만 동시에 우리도 알고리즘을 학습시킨다. 관계는 일방향이 아니라 상호작용이다. 스마트폰이 우리 대화를 엿듣고 그것을 바탕으로 알고리즘을 재구성하기도 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알고리즘 금식이 필요한 이유  

융 심리학적으로 본다면 알고리즘은 어쩌면 무의식의 거울일 수도 있다. 내가 오래 응시한 욕망, 인정하지 못한 결핍, 자꾸 피했던 감정이 추천 피드 속에서 증폭되어 돌아온다. 외로운 사람은 관계 콘텐츠에 머물고, 불안한 사람은 자기 계발 영상에 집착하며, 억눌린 분노는 복수 서사에 끌린다.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은 오지 생존 영상을 반복해서 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융이 말한 개성화는 무의식에 끌려다니는 삶이 아니다. 무의식을 의식화해 나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왜 이것에 끌리는가?’ 그래서 가끔은 ‘알고리즘 금식’ 이 필요하다. 하루쯤은 추천 피드를 끄고 긴 글을 읽거나 산책을 해 보라.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자문해 보라. ‘나는 지금 무엇을 피하고 있나?’ ‘왜 이런 콘텐츠를 반복해서 보는가?’ ‘이 안에 내가 인정하지 못한 욕구가 있는가?’

인간은 자신이 오래 바라본 것에 의해 형성된다. 무엇을 응시하는가가 결국 어떤 사람이 되는가를 결정한다. 그래서 진짜 질문은 ‘알고리즘이 나를 조종하는가?’가 아니다.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에 나를 내주고 있는가?’ 알고리즘은 결국 우리가 보여준 것만 돌려줄 뿐이다. 진짜 두려움은 따로 있다. 어느 날 추천 피드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그 안에서 자기 얼굴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내가 외면해 온 결핍, 인정하기 싫었던 욕망, 수없이 삼켜 온 감정이 콘텐츠의 형태로 줄 서 있는 그 광경. 강물은 자기가 흘러온 지형을 기억한다. 굽이굽이 돌아온 굴곡마다 강바닥에 흔적을 새긴다.

알고리즘도 그렇다. 두려움이 멈춘 자리, 욕망이 주저하던 자리, 외로움이 손을 뻗었다 거둔 자리. 그것이 모여 하나의 지도가 되었다. 그 지도의 이름은 당신이다. 알고리즘은 우리를 조종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이미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조용히, 그러나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을 뿐이다.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자기 인생의 단순한 소비자에서 자기 삶의 세밀한 관찰자로 변화할 것이다. 어쩌면 이때가 알고리즘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더 잘 아는 시작점이 아닐까 싶다.

김진국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