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년 역사를 자랑하는 색동회가 최근 새 리더를 뽑았다. 주인공은 제15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홍대순 광운대 경영대학원 교수다. 100년 넘게 아동문학가나 동요·동화 작가가 주로 맡아오던 색동회 이사장에 경영전략가가 선출된 것은 창립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홍 이사장은 기업 전략과 국가 산업 전략 분야에서 이름을 널리 알려온 전문가다.
색동회는 1923년 소파 방정환 선생을 필두로 뜻있는 선각자들이 창립한 세계 최초의 어린이 문화 운동 단체다.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동화·동요 보급에 앞장서며 암울했던 일제강점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아동문화의 기틀을 닦았다. 홍 이사장은 올해 5월 5일 어린이날, 서울 종로 세계 어린이 운동 발상지 기념탑 앞에서 ‘미래 100년선포식’을 열고 힘찬 출발을 알렸다. 최근 서울 성북구 광운대에서 홍 이사장을 만나 색동회 새 비전과 어린이 정책에 관한 생각을 들었다.
경영학 전문성을 어떻게 색동회에 접목할 계획인가.
“평생 기업과 산업, 국가의 전략을 연구했지만, 어린이 분야는 그동안 전략적 접근이 부족했던 영역 중 하나인 것 같다. 취임 직후 ‘자문단’ 위촉을 시작했는데, 제1호 자문위원으로 시각장애가 있는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을 영입했다. 비록 몸은 불편하지만 너무나 명랑한 어린이인데, 신체적 제약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고 용맹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큰 배움을 얻는다. 제2호 자문위원은 다문화가정 어린이를 모셨다. 어린이로부터 직접 목소리를 듣고 정책에 반영하는 것이야말로 경영학에서 말하는 가장 기본적인 고객 중심 전략이다.”
한국 아동의 학업 성취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상위권, 반면 행복 지수는 꼴찌를 기록했다.
“지금도 정부가 다각적인 종합 계획을 수립하고 예산을 투입하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다만 현재의 정책과 예산은 눈에 보이는 시설이나 하드웨어적 요소에만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어린이를 단순히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어른처럼 독립된 인격체로 바라보는 관점이 사회 전반에 정착돼야 한다. 색동회를 ‘정서 백신을 놓아주는 세계적인 어린이 기관’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어린 시절 BCG(결핵)백신이나 소아마비 백신을 맞아 건강을 지켰듯, 동화 구연과 동요, 아동극을 통해 어린이 마음에 따뜻한 정서 백신을 놔야 한다. 이는 성인이 돼서도 삶을 지탱해 주는 강력한 정서적 면역력으로 작용한다.”
최근 촉법소년 나이 하향이나 노키즈존 확산 등 아동 인권을 둘러싼 논란이 크게 늘었다.
“노키즈존에 대해 이분법적으로 ‘무조건 반대한다’고 선언하기는 조심스럽다. 자영업자나 업주 자율권도 엄연히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실천적 제안을 하고 싶다. 정말 그렇게 하고 싶다면 노키즈존 표기를 영어 대신 ‘어린이 출입 금지’라는 명확한 한글로 써 달라는 것이다. 영어로 써 놓으면 심리적 부담이 적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내거는 경우가 많다. 반면 한국어로 크게 써 붙이면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정말로 어린이 출입을 막겠다는 확고한 철학이 있다면 당당하게 한글로 써라. 무엇보다 어린이를 비롯해 특정 계층의 공공 활동 경험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문화를 사회는 적극적으로 재고해야 한다. 촉법소년 나이 하향 문제 역시 지극히 기능적인 접근에 불과하다고 본다. 기준 나이를 한 살 낮추고 높이는 것은 본질이 아니다. 왜 어린이들이 그런 범죄 환경에 노출되고 무너지는지,근본적인 원인을 치유하는 방향으로 사회적 어젠다를 승화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다. 학교 폭력 중에서 특히 언어폭력은 정말 시급하게 다뤘으면 좋겠다. 언어폭력이 뇌에 남기는 상처는 물리적 폭력 못지않게 치명적이다.”
최근 요린이(요리+어린이)·주린이(주식+어린이)·골린이(골프+어린이) 같은 신조어가 아동 비하 논란을 낳고 있다.
“어른들이 종종 ‘애하고 놀아줬다’고 하는데 그 표현에는 이미 어른이 ‘갑’의 위치에 있다는 오만이 전제돼 있다. 마찬가지로 무언가에 미숙한 사람을 뜻할 때 붙이는 ‘~린이’라는 말에는 어린이를 미숙하고 열등한 존재로만 바라보는 삐뚤어진 시선이 담겨 있다. 더 큰 문제는 그런 표현을 쓰는 대다수에게 악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저 유행하니까, 혹은 익숙하다는 이유로 무의식적으로 쓰는 문화가 됐다. 장애인을 비하하는 표현에 대해서는 강력한 사회적 저항과 자정 작용이 일어나지만, 어린이 비하 표현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저항이 없다. 우리 잠재의식에 어린이를 존엄한 인격체가 아닌, 서툴고 미완성된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깔려 있음을 증명한다. 그렇다고 ‘어린이’라는 단어 자체를 바꿀 이유는 없다. 잘못 사용하는 어른이 언어 습관을 고쳐야지, 그 잘못에 맞춰 단어를 바꾸는 것은 주객전도다.”
색동회 세계화와 미래 100년을 향한 청사진은 무엇인가.
“색동회는 100여 년 전 세계 최초로 어린이 문화 운동을 시작한 유서 깊은 단체다. 유엔 아동 권리 선언보다 훨씬 앞서 어린이의 권리와 존엄을 세상에 외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위대한 역사가 전 세계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것을 글로벌 무대에 제대로 알리는 것이 내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다. 우선 미국 워싱턴 D.C.나 로스앤젤레스 등 한인 디아스포라 사회를 중심으로 해외 지회를 구축하려 한다. 이민 1세대뿐만 아니라 2세대, 3세대 한인 어린이가 동화와 동요를 통해 한국적인 정서와 나라 사랑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이어가도록 돕는 것이다. 색동회 자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도 추진할 계획이다. 현재 색동회의 초기 회의록과 유물은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장기적으론 ‘세계 어린이 문화·예술 올림픽’ 과 ‘어린이 다보스 포럼’을 국내에서 개최하는 것이다.”
어린이를 키우는 부모와 어른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법정 기념일이면서 동시에 전 국민이 쉬는 공휴일인 날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수많은 법정 기념일 중에서 어린이날만이 유일하게 과거의 사건이나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기념하는 날이다. 이처럼 가치가 엄청난 날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통령이 직접 주관하는 공식적인 국가 의식이 없다는 점은 매우 아쉽다. 어린이날을 대통령 주관의 국가 의식으로 격상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온 국민이 어린이를 존엄한 인격체로 예우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어린이날을 국가 의식으로 격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세계적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생전에 ‘평생 가장 힘들었던 것은 ‘동심(童心)’을 유지하는 것이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동심이야말로 오늘날 메마른 이 시대를 구원할 진정한 자이트가이스트(zeitgeist), 즉 시대정신이라고 확신한다.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순수한 동심을 지켜나갈 때, 우리 사회의 연대와 공감, 포용과 다양성이 비로소 단단하게 싹을 틔울 수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우리가 ‘높고 아름다운 문화의 대국이 돼야 한다’고 간절히 소망했다. 그 찬란한 문화 대국의 화룡점정은 다름 아닌, 어린이를 가장 존엄하게 대우하고 존중하는 나라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