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목 GDP는 노동시간당 산출량을 측정하는 만큼 시간이 지나면서 생산성이 얼마나 올랐는지를 보여준다. 드라기가 강조한대로 미국 생산성 증가의 견인차는 단연 실리콘밸리다. 미국은 첨단 IT 제품을 만들면서 소비하지만, 유럽은 만들지 않고 사다 쓰기만 한다. 실리콘밸리를 빼고 보면 두 지역의 생산성 격차는 거의 사라진다. 이에 대해 런던정경대의 루이스 가리카노 교수는 크루그먼 교수가 실리콘밸리 혁신의 파급효과를 놓치고 있다고 반박했다. 실리콘밸리 혁신의 파급효과는 미국 경제 전반의 임금이 같은 일을 하는 유럽 근로자에 비해 훨씬 높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필리프 아기옹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와 파리경영대학원의 앙토냉 베르고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크루그먼 교수가 애초에 잘못된 생산성 지표를 사용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하는 부분이 있다. 혁신이 어디서 일어나느냐가 정말 유럽인의 생활수준을 좌우하는 문제일까. 혁신이 경제성장에 결정적인 것은 맞지만, 생활수준까지 좌우하지는 않는다. 실리콘밸리에서 나온 제품은 국내외 경쟁 덕에 시간이 갈수록 값이 떨어졌다. 덕분에 유럽 소비자의 구매력도 미국 소비자와 함께 올라갔다. 크루그먼의 역설은 이렇게 풀린다. 유럽인은 시간당 생산량은 적지만, 미국과 교역으로 이득을 봤기 때문에 같은 소득으로 미국인만큼 살 수 있다.
이런 주장은 미국 프린스턴대 ③ 진 그로스먼 교수와 하버드대 엘하난 헬프먼 교수의 기념비적 연구가 뒷받침한다. 두 학자는 세계적 혁신 경쟁에 뛰어든 나라의 성장과 후생을 가르는 요인을 분석했다. 유럽처럼 혁신 경쟁에서 밀린 나라는 세계시장에서 점유율을 점점 잃는다. 국제 경쟁 격화로 같은 기술을 두 나라가 중복 개발할 여지가 사라지면서 뒤처진 나라의 혁신 활동은 위축되고 성장률도 떨어진다. 그럼에도 후생 측면에서는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다. 독점력이 있는 기업끼리 국경을 넘어 경쟁하는 과정에서 더 혁신적인 나라에서 일어난 성과의 과실이 소비자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유럽도 경제성장 자체는 걱정해야 한다. 유럽 최대 경제국 독일은 명목 GDP 기준으로 2019년 이후 줄곧 정체 상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에도 불구하고, 독일 경제의 부진은 미국이 아니라 중국과 훨씬 깊이 얽혀 있다. 독일 경기가 꺾인 시점은 중국이 기술력에서 급부상하고 고부가가치 수출에서 도약한 시기와 겹친다. 중국은 어느새 친환경·디지털 기술의 글로벌 선도국으로 올라섰다. 이 변화는 독일에 뼈아픈 타격을 입혔다. 자동차, 기계, 화학처럼 독일의 연구개발(R&D) 집약 산업 상당수를 중국이 정면으로 위협하고 있다. 이런 핵심 산업에서 중국에 시장을 내주면서 독일 경제는 멈췄다. 이런 흐름이 이어진다면 독일(더 넓게는 유럽)은 값싼 중국산 전기차와 기계 수입으로 이득을 보더라도 결국은 혁신뿐 아니라 생활수준에서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경제성장은 노동력과 자본 같은 생산요소를 얼마나 많이 투입하느냐에 달려 있다. 미국의 1인당 GDP가 더 높은 데는 미국인이 더 오래 일한다는 이유도 있다. 반면 독일의 노동 투입은 다른 나라에 비해 적다. 독일 근로자의 연평균 근로시간은 약 1350시간으로, 프랑스 1500시간, 미국 1800시간에 못 미친다. 7년째 이어진 정체로 생활수준이 떨어질 것을 우려한 독일 당국은 근로시간을 늘리려 한다. 특히 어머니들이 집에 머물게 하는 세제 혜택을 손질해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유인을 키울 계획이다. 이 발상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독일의 연평균 근로시간이 짧은 것은 많은 여성이 시간제 일자리로노동시장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덕에 참여율은 높아졌지만 1인당 평균 근로시간은 짧아졌다. 독일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노동시장 참여율은 최상위권이지만, 연평균 근로시간은 최하위권이다. 다만 노동 투입을 늘리는 것만으로 독일 경제가 되살아나기는 어렵다. 장기 성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결국 혁신 능력, 즉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힘이다. 그런데 독일은 자국 경제의 성공을 이끌어온 바로 그 산업을 중국에 내줄 위기에 놓여 있다. 산업의 혁신 무대가 어느새 중국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렇게 되면 독일과 유럽이 잃는 것은 경제성장에 그치지 않는다. 생활수준까지 함께 흔들리게 된다.
크루그먼 교수가 띄운 이 논쟁은 결국 경제성장과 경제 후생을 구분해 봐야 한다는 점을 일깨운다. 유럽은 혁신 측면에서 미국에 밀리면서도 생활수준은 유지해 왔다. 세계화 덕에 다른 나라에서 나온 기술의 과실을 함께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혁신은 남에게 맡기고 그 과실만 누리는 구도가 무한정 지속되리라 장담할 수는 없다. 독일이 보여주듯 혁신 역량과 산업 경쟁력을 오래 잃으면 결국 성장 둔화, 소득 정체, 생활수준 하락으로 이어진다. 노동 공급을 늘리면 단기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끌 수 있지만, 새로운 기술과 산업을 만들어내는 일을 대신할 수는 없다. 유럽의 장기 번영은 더 오래 일하는 데 있지 않다. 기술 최전선에서 혁신하고 경쟁할 능력을 되찾는 데 달려 있다.
Tip
① 유럽 경쟁력 보고서(일명 드라기 보고서): 마리오 드라기 전 ECB 총재가 EU 집행위원회의 의뢰를받아 작성한 400쪽 분량의 보고서. 그는 유럽이 미국·중국과 기술 격차를 좁히지 못해 ‘느린 고통’을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첨단 기술 투자 부족, 높은 에너지 비용, 규제 장벽을 원인으로 지목하면서 유럽이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 매년 최대 8000억유로(약 1438조원) 규모의 추가 공공·민간투자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② 구매력평가(PPP) 기준 1인당 GDP: 국가 간 물가수준 및 화폐의 실질 구매력을 고려해 산출한 1인당 GDP이다. 단순 환율을 적용한 명목 GDP와 달리 동일한 돈으로 각국에서 실제로 살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을 측정한다. 크루그먼 교수는 유럽의 명목소득이 미국보다 낮아 보여도 보육·의료·통신 등 전반적인 생활 물가가 낮기 때문에 PPP 기준으로 유럽인의 실질 생활수준은 미국과 대등한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③ 그로스먼-헬프먼 모델: 프린스턴대의 진 그로스먼 교수와 하버드대의 엘하난 헬프먼 교수가 1991년 저서 ‘개혁과 성장의 무역정책’에서 정립한 내생적 성장 이론. 이 모델에 따르면, 혁신 경쟁에서 뒤처진 국가(유럽)는 시장점유율과 자체 성장률이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더 혁신적인 국가(미국)의 기술 발전으로 인해 제품 가격이 하락하면 이를 수입해 쓰는 낙후국 소비자도 경제적 이득(후생 증가)을 공유하게 된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