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88 서울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를 만든 이탈리아 작곡가 조르조 모로데르를 서울에서 만난 적 있다.
모로데르는 세계 전자(일렉트로닉)음악의 선구자다. 1977년 도나 머서의 ‘I Feel Love’를 제작함으로써 전자 댄스음악의 미래 청사진을 일찌감치 펼쳤다. 컴퓨터음악이 없던 시절, 아날로그 테이프를 물리적으로 잘라 붙이면서 전자 댄스음악의 초석을 다진 스토리를 인터뷰 때 산증인 모로데르의 육성으로 듣는 쾌감은 과연 짜릿했다. 그는 영화 ‘탑건’ 주제곡 ‘Take My Breath Away’와 ‘플래시 댄스’ 주제곡으로 아카데미 최우수 주제가상을 두 차례나 받았다. 서머의 ‘Hot Stuff’, 블론디의 ‘Call Me’도 그의 손끝에서 마무리됐다.
한국인으로서 ‘손에 손잡고’ 제작 뒷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소름 돋는 경험이었다. 서울의 국악 학원에 방문해 대고(大鼓) 소리를 듣고 반한 뒤 ‘손에 손잡고’ 간주 부분에 ‘킬포(킬링 포인트)’로 넣었다는 이야기, 영어 버전에도 한국 올림픽조직위원회 권유를 받아들여 가사 ‘Arirang~’을 포함시켰다는 이야기 등이 깨알 같았다. 모로데르는 1984년 LA 올림픽 주제가 ‘Reach Out’,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주제가 ‘Un’estate italiana’를 만들기도 했다.
사실 진짜 깨알 재미는 ‘조르조가 조르조를 만난 얘기’였다. 주제가를 부른 그룹 코리아나 멤버를 직접 데리고 밀라노로 날아가 올림픽 개회식 때 입을 의상 제작을 의뢰한 이야기다. 모로데르가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 작업으로 인연을 맺은 ‘조르조 아르마니 형님’에게….
빌보드 "월드컵 축하 무대 가장 기대되는 가수" 설문, BTS 1위
이 긴 서론을 종합해 보면 가장 놀라운 부분은 개발도상국에 불과한 한국에서 행사 하나, 그중에서도 개회식 한 건 치르는 데 당대 세계 최고 작곡가이자, 음악 프로듀서와 최고의 의상 디자이너를 마구 기용했다는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르면, 88 서울 올림픽에 투여된 비용은 2조3826억원에 달한다. 당시 올림픽복권 1등 당첨 금액이 1억원이었고, 이는 강남 은마아파트 두 채를 살 가격이었음을 감안하면, 가히 천문학적 예산이 아닐 수 없다.
6월 12일,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이 개막했다. 대형 스포츠 이벤트를 위해 작곡가, 가수, 노래를 수입하던 우리나라가 이제 ‘수출국’이 됐다. 멕시코시티 개막식 무대에 ‘케이팝 데몬 헌터스’ 주역인 이재가 출연해 이탈리아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와 함께 주제가를 불렀다. ‘또 넘어져도 난, 또다시 일어나’ 하는 한국어 가사도 있는 곡이다. 미국 LA 소파이스타디움 개막식 무대에는 블랙핑크 리사가 섰다.
앞서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개막식에 방탄소년단(BTS) 정국이 나왔을 때만 해도 놀라웠는데, 미국 ‘빌보드’가 개막을 앞두고 벌인 설문 조사 ‘이번 월드컵 축하 무대에서 가장 기대되는 가수는 누구인가?’에서 방탄소년단과 리사가 1, 2위를 차지했다. 기대감 순위에서 팝스타 샤키라, 케이티 페리, 마돈나를 제친 것이다. 참, 방탄소년단은 월드컵 최초로 열리는 결승전 하프타임 쇼에 출연한다.
슈퍼볼 하프타임 쇼 출연은 '레전드' 보증수표
하프타임 쇼 이야기가 나오면 미국 프로 풋볼 연간 결승전인 슈퍼볼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식축구를 몰라도 좋다. 슈퍼볼 하프타임 쇼는 그해 세계 음악 팬의 관심이 집중되는 슈퍼 팝 이벤트다. 슈퍼볼을 팝최후의 격전장으로 만든 것은 마이클 잭슨이다. 그전까지 막간 쇼는 주로 대학 마칭밴드가 맡았다. 잭슨은 1993년 제27회 슈퍼볼 하프타임 쇼를 위해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의 로즈볼 구장 무대에 올랐다. 무대에 잭슨이 나타나자, 9만8000명 관객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잭슨은 의도적으로 무대에서 무려 90초간 동상처럼 멈춰 서서 객석 온도를 끓는 점까지 올린 뒤에야 폭발적인 곡 ‘Jam’의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1993년 슈퍼볼은 경기 시청률보다 하프타임 쇼 시청률이 높았던 첫해였다. 이후 모든 하프타임 쇼는 역사가 됐다. 다이애나 로스, 스티비 원더, U2, 재닛 잭슨, 폴 매카트니, 롤링 스톤스, 마돈나, 비욘세, 켄드릭 라마, 배드 버니는 수많은 화제를 낳으며 슈퍼볼을 스포츠 이벤트가 아닌 음악 이벤트처럼 만들어 버렸다. 감전 사고 위험성을 감수하고 보라색 전기기타를 든 채 무대에 올라 폭우 속에 ‘Purple Rain’을 부른 프린스(2007년),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처럼 스타디움 지붕에서 다이빙해 내려오며 공연을 시작한 레이디 가가(2017년) 등 도시 전설로 회자하는 무대가 숱하게 많다.
최고의 팝스타에게 미국 프로풋볼 리그(NFL)가 지불하는 출연료는 놀랍게도 ‘0원’ 이다. 제작비 지원이 있을 뿐. 심지어 2021년 더 위켄드는 자비 700만달러(약 109억2000만원)를 더 쏟아부어 무대를 꾸몄다. 왜? 천문학적 부가 효과 때문이다. 슈퍼볼 하프타임 쇼는 전 세계에서 1억 명 이상이 지켜보는 이벤트다. 슈퍼볼 다음 날, 해당 가수 노래에 대한 소비는 수 배에서 수십 배 폭증한다. 10년 전 발표한 노래도 역주행한다. 더 중요한 것은 가수 생명 연장이다. 유행 주기가 빠른 팝 시장에서 ‘슈퍼볼 출연 가수’는살아있는 전설이 되며 향후 수년에서 수십 년 동안 대규모 공연장에서 투어를 이어갈 수 있는 귀한 ‘콘텐츠 땔감’이 된다. 더 위켄드가 자비를 퍼부어 가며 최대한 멋진 무대를 남기려 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늘 높이 솟는 불/우리들 가슴 고동치게 하네~’
1988년에는 없었던 유행 어구, ‘가슴이 웅장해진다’의 의미가 새삼 다가오는 요즘이다. 웅장한 이벤트에 지갑도 웅장해지는 팝 스타의 심정에 대해 문득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