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앙리 마티스, '삶의 기쁨', 1905-1906년. /사진 위키피디아
1905년, 파리에서는 봄과 가을에 미술 전시회가 열렸다. 봄에는 왕실 아카데미의 전통을 이은 권위적인 관전(官展) ‘르 살롱(Le Salon)’이, 가을에는 실험적 작가가 참여하는 ‘살롱 도톤(가을 전시회)’이 열렸다.
그해 가을 전시회에서는 전시실 한쪽에 놓인 유명한 도나텔로의 대리석 조각상을 둘러싼 벽에 파격적인 작품이 걸려 있었다. 강렬한 빨강, 생생한 초록, 폭발하는 노랑. 형태는 단순하고 터치는 거칠며 색은 과잉인 작품이었다.
당시 한 비평가가 조각상을 가리키며 비웃었다. “짐승 사이의 도나텔로.” 이 조롱이 야수파(Fauvisme)라는 이름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전시회에 참여했던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와 그의 동료는 이 조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비평가는 무슨 작품을 보고 짐승이라고 했을까.
야수의 탄생
마티스가 가을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은 그의 아내 아멜리(Amélie)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였다. 그런데 그 초상화는 기존의 일반적인 초상화와는 색이 달랐다. 그림을 보면, 세로 형식의 캔버스에서 큰 모자가 화면 상단 3분의 1을 압도하고, 인물은 측면으로 앉아 있지만 얼굴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인물과 배경은 색채의 대비 속에서 선의 경계가 없어 보인다. 가장 주목받는 부분은 코에서 이마까지 이어지는 굵은 초록색 선 하나다. 그리고 얼굴에는 흔히 살색이라고 하는 사람의 피부색이 아닌 초록색이 곳곳에 칠해져 있다. 그림은 선과 색으로 구성되는데, 선은 옅어지고 색만이 관람자를 강력하게 자극한다. 이전에는 보지 못한 이러한 기괴한 그림을 보고 비평가는 짐승이라고 조롱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티스의 의도는 달랐다. 빛과 그림자의 감각적 대비를 색으로 옮긴 것이었다. 가운데를 가르는 굵은 초록 선은 보색 대비를 통해 양쪽 살빛을 더 생생하게 살아나게 하고, 관람자가 이성으로 그림을 분석하기 전에 눈이 먼저 반응하도록 한 장치였다.
선과 색의 위치를 바꾼 마티스
모든 그림은 기본적으로 선(線)과 색(色)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선은 경계를 만든다. 사물의 윤곽을 그리고 공간을 나누고, 원근을 계산한다. 선은 이성의 언어다. 르네상스 이래 500년간 서양 회화를 지배한 것이 바로 이 선이었다. 소실점을 향해 수렴하는 투시선, 해부학적으로 정확한 인체의 윤곽, 명암으로 빚어낸 입체감, 모두 선이 지배하는 세계다. 선은 형태와 입체감, 원근감을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그림 전체를 구성했다. 그래서 화가에게 선을 그리는 데생, 즉 형태를 그리는 작업은 가장 기초적인 회화 훈련이었다.
색은 그다음을 채우는 역할이었다. 한마디로 색은 선의 시종(侍從)이었다. 그러나 색은 직관적으로 느끼게 한다. 붉은색은 설명하지 않아도 뜨겁고, 파란색은 차갑다. 그러므로 색은 감성의 언어다. 그러나 이전까지 전통 회화에서 색은 언제나 선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하늘은 파랗게, 나무는 초록으로, 사람의 피부는 살색으로. 이처럼 이전에 색은 사실을 기록하는 도구였을 뿐, 감정을 전달하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마티스는 이 위계를 뒤집었다. 그림에서 선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색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원근법이 없고, 색으로 존재하는 평면만 남는다.
그의 대표작 ‘붉은 방’은 그 특징을 잘 보여준다. 1908년에 선보인 ‘붉은 방’은 온통 붉은색으로 압도되는 그림이다. 식탁보와 벽이 같은 붉은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이어지고, 수평면과 수직면의 경계선은 사라진다. 어디까지가 식탁 영역이고 어디까지가 벽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식탁 뒤의 의자, 테이블과 벽 사이를 스치는 희미한 선만이 삼차원 공간의 흔적을 남긴다. 창문 밖 초록의 나무와 넝쿨은 너무 평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실제 창문이 아니라 벽에 걸린 그림처럼 보인다. 실내와 실외의 경계마저 허물어진 것이다. 방의 붉은색과 창밖의 초록은 강렬한 보색 대비를 이루는데, 이는 마티스의 그림에서 자주 보이는 특징 중 하나로, 관람자가 생동감과 강렬한 색감을 인식하도록 한 마티스의 장치인 듯하다. 이 작품은 애초에 ‘푸른 방’으로 그려 주인에게 전달한 뒤, 마티스가 다시 ‘붉은 방’으로 개작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마음에 위안과 평안을 줄 수 있는 예술
마티스는 그림이 사람에게 순수함과 마음의 평안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삶의 기쁨’이다. 남프랑스 콜리우르의 여름을 담은 이 대작에서, 인물은 풀밭에 눕고 서로를 껴안고 있다. 파란 하늘 아래 초록의 나무가 펼쳐지고, 화면 저 멀리에는 사람들이 손을 맞잡고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제목처럼 그림 전체는 노란빛과 붉은 기운으로 가득 차 경쾌하고 따뜻하다. 나체 인물의 윤곽선은 단순하거나 사라지고, 색채가 그림 분위기 전체를 이끌어간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화면 저 멀리 작게 보이는 원형의 춤추는 장면, 마티스는 훗날 그 부분만 다시 꺼내 확대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작품 ‘춤(1)’이다. ‘삶의 기쁨’에서는 여섯 명이 원을 이루지만, ‘춤’에서는 다섯 명이 손을 맞잡고 리듬감 있게 춤추고 있다. 하나의 그림 속에 또 다른 걸작의 씨앗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선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형태를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공간을 측정하는 그림이 주를 이루었다. 색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그림은 이성으로 생각하기 전에 먼저 감성을 느끼게 한다. 색의 힘은 사람에게 위로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짐승 같은 그림이라고 조롱받았지만, 마티스는 평생 사나움을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표현한 것은 색이 만든 평안이었고, 선을 지운 자리에 피어난 순수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