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택트' 속 장면. /사진 파라마운트 픽처스
영화 '컨택트' 속 장면. /사진 파라마운트 픽처스

어느 날 지구 하늘 위로 열두 대의 비행 물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인류는 공포에 휩싸인다. 지금까지 수많은 영화가 그랬듯 외계의 침략과 전쟁이 시작될 거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공격하지 않는다. 광선총도 쏘지 않고 도시를 파괴하지도 않는다. 다리 일곱 개인 외계 생명체, ‘헵타포드’라 불리는 그들이 원하는 건 단 하나, 소통이다.

언어학자 루이스는 베일에 싸인 그들의 언어를 해독하기 위해 물리학자 이안과 함께 비행 물체 내부로 진입한다.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본 헵타포드는 미지의 두려움, 그 자체였지만 루이스는 차원이 다른 존재와 감응하기 위해 기꺼이 방호복을 벗고 담담 히 마주 선다. 소리를 듣고 문자를 보며 그들의 문법과 사유 방식을 유추한다.

김규나 -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김규나 -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헵타포드의 문자를 해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할 때만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소통이 원활한 것도 아니다. 부부는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자주 서로를 오해한다. 부모와 자식은 사랑하면서도 말로 깊은 상처를 주고받는다. 같은 나라, 같은 시대를 살며 동일한 언어를 쓰면서도 우리는 타인과 완전한 소통에는 번번이 실패한다.

루이스는 헵타포드가 유리 벽 너머로 먹물을 흩뿌리듯 허공에 그려내는 문자가 인간의 언어와 본질부터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인간의 사고와 시간은 직선적이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따지고 과거와 현재, 미래로 나누어 생각한다. 겨울이 가야 봄이 오고, 씨앗을 심어야 꽃이 핀다. 사랑하면 이별이 찾아오고 태어난 모든 것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그것이 인간이 갇혀 있는 시간의 굴레다. 

반면 헵타포드에겐 시작과 끝이 없다. 그들에겐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동시에 존재한다. 책을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는 독자와 달리 첫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를 동시에 바라보는 셈이다. 현상은 원인과 결과가 차례로 이어지는 연쇄반응이 아니라 처음과 끝을 동시에 직관하며 성립되는 현재다. 

언어는 단순히 감정과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는다. 사물을 보는 방식을 바꾸고 사고를 지배하며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다.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게 아니라, 언어가 지배한 생각이 그 존재를 빚어낸다. 언어야말로 세계를 해석하는 창이며 인간의 운명을 완성하는 틀인 것이다. 그렇다면 차원이 다른 존재의 언어와 감응하게 될 때 인간은 그동안 보지 못하던 것을 보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하며 인식의 확장을 경험하게 되지 않을까. 

헵타포드의 문자를 온전히 수용하고 그들의 사유 체계를 체득하게 되면서 루이스의 영혼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그녀는 미래를 ‘기억’하게 된다. 미래를 예견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이미 그 자리에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녀는 흐릿한 시공간 너머로 미래를 바라본다. 그녀는 이안과 사랑하고 결혼한다. 그리고 품에 안긴 눈부신 아이. 아이가 웃는다. 아이가 자란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를 떠나고 아이는 너무 일찍 숨을 거둔다. 

영화 '컨택트' 속 장면들. /사진  파라마운트 픽처스
영화 '컨택트' 속 장면들. /사진 파라마운트 픽처스

자기 미래를 미리 알게 되면 어떨까. 상상한 적 없고 바란 적 없는 슬픔이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하는 사람과 언젠가 아프게 헤어질 것을 안다면 시작조차 하지 않을 것인가. 태어날 아이가 일찍 세상을 떠날 것을 안다면 그 생명을 포기할 것인가.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면 걸음을 멈출 것인가. 오지 않은 내일을 염려하느라 정작 손에 쥔 오늘이라는 기적을 놓쳐도 괜찮은 것인가. 

인간은 결과를 알고도 살아가는 존재다. 우리는 모두 죽음이라는 단 하나의 결말을 향해 달린다. 내일일지도 모르고 오십 년 뒤일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끝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살기를 그만두는 사람은 없다. 소멸이 예정돼 있다고 해서 사랑을 단념하는 사람 또한 없다. 

봄날의 벚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곧 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젊음이 찬란한 이유 역시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이 지금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끝이 있기 때문에 매 순간은 더없이 소중해진다. 사람은 이별을 알면서 사랑하고, 상처를 알면서 마음을 열고, 죽음을 알면서 오늘을 살아간다. 예정된 결말에도 우리는 기꺼이 눈물을 닦고, 느끼고 깨닫고 배우며 사랑하고 도약한다. 그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가령, 기차를 타고 같은 거리를 여행할 때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라면 짧게 느껴질 것이고 싫은 사람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하염없이 길고 지루할 것이다. 무한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이 삶은 찰나에 불과할지 모른다. 이 안에서 행복과 불행을 나눌 수 있는 것일까. 루이스는 선택한다. 아니, 어쩌면 선택이라는 말조차 무의미할지 모른다. 루이스는 미래의 슬픔에 현재를 저당 잡히는 대신 그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절망적인 체념이나 운명에 대한 수동적인 굴종이 아니다. 그것은 다가올 고통까지도 내 삶의 귀한 일부로 껴안겠다는 진정한 삶의 포용이며,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다. 헵타포드와 조우는 루이스라는 한 인간의 의식을 깨우고, 그녀의 삶을 온전히 끌어안을 수 있게 했다. 이 신비로운 경험은 열두 대의 비행 물체를 목격한 지구상의 수많은 ‘나’의 인생 역시 저마다의 방식으로 확장해 놓았을 것이다.

시작과 끝은 결국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과거는 지나갔기에 없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실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우주는 오직 현재,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 이 순간뿐이다. 비록 불행이 예고되어 있을지라도, 끝이 보일지라도 도망치지 않고 반드시 지켜내고 싶은 사랑과 진실과 꿈을 가슴에 품고 산다면, 고독할지언정 세상은 ‘나’의 것이고, 우주는 ‘나’를 위한 것이며, 모든 것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 설사 정해진 길일지라도 끝내 품위를 잃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는 당신을 위해 이 광활한 우주는 지금, 이 순간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김규나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