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트로픽의 ‘클로드 미토스’. /사진 AFP연합
앤트로픽의 ‘클로드 미토스’. /사진 AFP연합

미국 정부가 인공지능(AI) 기업 앤트로픽의 최신 모델 ‘페이블 5(Fable 5)’와 ‘미토스 5(Mythos 5)’에 대해 외국 국적자의 접근을 전면 차단하면서 글로벌 AI 산업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반도체와 첨단 장비에 이어 AI 모델 자체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수출 통제 대상이 된 것이다. 

앤트로픽은 6월 12일(이하 현지시각) 홈페이지 공지를 통해 미국 정부의 수출 통제 조치에 따라 두 모델의 외국인 사용이 제한됐다고 밝혔다. 적용 대상은 해외 이용자뿐 아니라 미국 내 체류 중인 외국인과 외국 국적 앤트로픽 직원까지 포함됐다. 이번 사태는 AI 패권 경쟁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동안 미국은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 반도체 제조 장비,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EDA) 등을 중심으로 중국과 경쟁국에 대한 기술 통제를 강화해 왔다. 이제는 최첨단 AI 모델 자체가 국가 전략 자산으로 분류되기 시작하면서 AI 공급망 전반이 지정학적 경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출시 사흘 만에 차단된 미토스… 美 ‘국가 안보 자산’ 규정

앤트로픽은 이용자 국적을 즉시 구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모든 고객의 접근을 일시 중단했다. 페이블 5와 미토스 5는 6월 9일 공개된 지 불과 사흘 만에 사실상 시장에서 퇴장하게 됐다. 회사는 “규정 준수를 위해 해당 모델을 비활성화했다”면서도 “다른 클로드 모델 서비스는 정상적으로 제공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 정부가 문제 삼은 것은 페이블 5의 ‘탈옥(jailbreak)’ 가능성이다. 탈옥은 AI에 내장된 안전장치를 우회해 원래 제한된 답변을 끌어내는 기법을 말한다. 

사건의 발단은 앤트로픽 최대 투자사인 아마존이었다. 미국 언론에 따르면, 아마존 연구진은 페이블 5가 특정 방식의 프롬프트를 통해 보안 취약점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앤디 재시 아마존 최고경영자(CEO)가 이를 미국 정부 측에 전달했다. 백악관은 긴급 검토에 착수했고, 결국 상무부를 통해 수출 통제 조치를 내렸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미토스 5와 페이블 5의 사이버 보안 역량이 악용될 경우 국가 안보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토스 5는 소프트웨어 취약점을 찾아내고 공격 가능성을 분석하는 능력에서 현존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방어 목적에선 강력한 보안 도구지만, 반대로 악성 행위자에게는 공격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앤트로픽은 즉각 반발했다. 회사 측은 정부가 문제 삼은 수준의 취약성은 오픈AI GPT-5.5 등 경쟁 모델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이 기준을 업계 전체에 적용하면 사실상 최첨단 AI 모델 출시를 중단하라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중국 연계 의혹 한국 통신사에 AI 제공”

이번 사태가 주목받는 이유는 미국 정부가 AI 모델 자체에 대해 사실상 승인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점 때문이다. 그간 미국 정부는 반도체와 장비 같은 물리적 자산을 통제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AI 서비스의 배포 여부 자체가 정부 판단에 의해 결정됐다. 미국 정보기술(IT) 업계에서는 “AI 모델도 허가제 시대가 열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로 앤트로픽은 수출 통제 해제를 위해 주요 기술진과 정책 담당자를 워싱턴 D.C.로 급파해 백악관 및 상무부 관계자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사이버 보안 업계 인사도 공개적으로 반발했다. 악시오스에 따르면, 루타 시큐리티의 케이티 무수리스 CEO와 그레이노이즈 인텔리전스 창업자 앤드루 모리스 등은 공개서한을 통해 “이번 조치가 미국의 AI 리더십과 사이버 방어 역량을 약화시킬 수 있다”며 수출 통제 재검토를 촉구했다.

일부에서는 이번 조치가 단순한 보안 문제를 넘어 트럼프 정부와 앤트로픽 간 갈등의 결과라는 해석도 제기한다. 앤트로픽은 AI 안전성을 강조하며 정부와 여러 차례 의견 충돌을 빚어 왔고, 최근에는 AI 군사 활용 문제를 둘러싸고 국방부와 긴장 관계를 형성해 왔다. 반면 미국 정부는 정치적 의도를 부인하고 있다. 백악관은 “오직 모델 안전성 문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조치는 한국에도 직접 영향을 미쳤다. 앞서 앤트로픽은 최근 사이버 보안 협력 프로그램인 ‘프로젝트 글래스윙(Project Glasswing)’ 참여 대상을 전 세계 15개국 150여 개 기관으로 확대했다. 프로젝트 글래스윙은 미토스 계열 모델을 활용해 소프트웨어 취약점을 선제적으로 찾아내는 글로벌 보안 협력 프로젝트다. 한국에서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SK텔레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등이 참여 대상에 포함됐다. 그러나 이번 조치로 국내 기관과 기업의 활용 계획도 불확실해졌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미 정부는 중국 연계 의혹을 받는 한국 통신사에 미토스가 제공되는 것을 우려해 수출 통제 조치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AI 주권 경쟁 본격화… ‘AI 블록화’ 시대로

전문가는 이번 사건을 ‘소버린 AI(Sovereign AI·특정 국가에 종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AI)’ 시대의 개막 신호로 해석한다. 소버린 AI는 국가가 자체적으로 개발·운영·통제할 수 있는 AI 역량을 뜻한다. AI 모델뿐 아니라 데이터와 컴퓨팅 인프라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한국도 이미 소버린 AI 전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정부는 ‘AI 3대 강국’ 목표 아래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며, LG AI연구원, SK텔레콤, 업스테이지, 모티프테크놀로지스 등이 참여하고 있다. 중국과 유럽도 AI 자립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은 데이터·인재 유출을 통제하고, 유럽은 AI법(AI Act)을 중심으로 독자 규제를 구축 중이다. 문제는 AI 패권 경쟁이 오히려 미국의 장기적 우위를 약화시킬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다. 미국이 최첨단 모델 접근을 제한할수록 각국은 자체 모델 개발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게 된다. 엔비디아 반도체 수출규제가 중국의 자체 AI 반도체 개발을 촉진한 것과 비슷한 현상이 반복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특히 미국이 최첨단 폐쇄형 모델에 대해 외국 국적자 접근까지 차단하는 ‘AI 통제’에 들어간 날 중국에서는 문샷AI가 키미 K2.7-Code처럼 고성능 코딩 모델의 가중치와 사용 기반을 공개하며 오픈 소스 확산 전략을 이어갔다. 

이번 사태는 AI 산업이 개방과 협력 중심의 글로벌 생태계에서 국가 안보와 산업 전략 중심의 체제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문가는 앞으로 주요 국가가 자국 AI 역량 확보에 나서면서 세계 AI 시장이 권역별로 재편되는 ‘AI 블록화’가 가속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Plus Point

‘AI판 핵확산금지조약(NPT)’ 등장할까

미국의 앤트로픽 AI 모델 수출 통제 조치는 국제 AI 거버넌스 논의에도 불을 지피고 있다. 초고성능 AI가 반도체나 핵 기술처럼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전략 자산으로 인식되면서, 국제사회에서도 새로운 규범 체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국 랜드(RAND) 연구소는 최근 보고서에서 AI 거버넌스가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일정 부분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국제 AI 감시 체계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AI 거버넌스 연구자이자 구글 딥마인드 연구원인 헤이든 벨필드는 “AI를 위한 IAEA와 NPT가 필요할 수 있다”며, 일정 수준 이상의 프런티어 AI 모델 개발과 배포를 국제사회가 공동 감시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번 사태는 유럽의 ‘AI 주권(AI Sovereignty)’ 논의에도 힘을 싣고 있다. 미국 경제 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앤트로픽 모델 접근 차단이 “AI 주권을 주장해 온 유럽 진영의 논리를 강화했다”고 평가했다. 프랑스 AI 스타트업 미스트랄(Mistral)의 공동 창업자 겸 CEO인 아르튀르 멘슈도 미국 빅테크 AI 모델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국가 차원의 위험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해 왔다. 

다만 AI를 핵무기처럼 통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AI는 핵 기술과 달리 복제가 쉽고 민간 활용 범위도 넓다. 그럼에도 이번 사태는 초고성능 AI가 국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국제사회가 새로운 AI 규범과 감시 체계 논의를 본격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선목 기자
이코노미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