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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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 한국 증시는 ‘산업이 곧 수익률’이었다. 인공지능(AI), 전력 기기, 반도체, 비만 치료제 등 메가 트렌드의 방향성만 맞추면 그 산업에 속한 종목이 동반 상승하는 경우가 많았다. 산업의 베타(β)가 개별 종목의 알파(α)를 압도하며 톱다운(top-down) 투자 전략이 압도적으로 빛났다. 산업의 방향성만 잘 따라가도 그 산업에 속한 다수 종목이 평가되는 낙수 효과가 뚜렷했던 만큼 어떤 산업에 속해 있는가가 수익률의 8할을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제 나올 질문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다음은 무엇인가. 시장은 의외의 답을 내놓고 있다. 반도체 다음은 화장품도 아니고 레저도 아니다. 바로 ‘실적’이다. 최근 강세를 보이는 종목을 살펴보면 특정 산업으로만 묶기가 어렵다. 또한 같은 산업, 같은 테마로 묶여 있던 종목 사이에서 주가 흐름과 밸류에이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반도체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화장품에서는 글로벌 수출 기업이, 소비재에서는 해외 시장점유율을 확대하는 기업이, 호텔·관광에서는 실적 턴어라운드 기업이 주목받고 있다.

엄여진 - 팔구십(Palgusip) 대표, 연세대 경영학, 전 신영증권 제약·바이오 애널리스트, 전 부국캐피탈 PE금융팀장
엄여진 - 팔구십(Palgusip) 대표, 연세대 경영학, 전 신영증권 제약·바이오 애널리스트, 전 부국캐피탈 PE금융팀장

그렇다면 그동안의 시장은 왜 ‘산업장’이었을까. 산업장이 강했던 이유 중 하나는 풍부한 유동성이 산업 전체에 밸류에이션 프리미엄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투자자는 산업의 성장성만 확인되면 개별 기업의 차이를 세밀하게 따지기보다 산업 전체를 매수했다. AI, 전력 기기, 반도체 등 주요 테마가 등장할 때마다 관련 종목이 동반 상승했다. AI는 그래픽처리장치(GPU)로, GPU는 고대역폭 메모리(HBM)로 이어지는 수혜 구조가 명확했다. 시장은 개별 기업의 경쟁력보다 산업 전체가 성장하는 방향성에 더 주목했고, 해당 산업에서 수혜주를 찾는 일이 중요한 시기였다.

결국 투자 방식도 개별 종목보다 산업 자체에 투자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AI 상장지수펀드(ETF), 반도체 ETF, 전력 인프라 ETF 등 테마형 자금 유입이 확대되면서 산업 전체가 하나의 자산군처럼 거래되기 시작했다. 기관투자가 역시 특정 기업보다 산업 비중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업종 내 종목이 동반 상승하는 현상이 반복됐다. 

산업 초기 단계에서는 옥석 가리기가 어렵다는 점도 산업장을 강화했다. 새로운 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전에는 대부분 기업이 크게 차별화되지 않는다. 아직 실적이 충분히 나지 않고, 어디가 최종적으로 살아남을지 알 수 없어서 투자자는 개별 기업을 선별하는 것 자체에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 실제로 AI, 전력, 반도체 등 최근 시장을 주도하는 산업은 모두 이런 특징을 보인다. 산업 성장성 자체가 가장 중요하기에 개별 기업의 차이는 덜 부각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시장에 유동성이 말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시장은 너무 많은 돈을 소화해야 하는 상황에 가깝다. 국민연금뿐만 아니라 각종 연기금, 공제회, 정책 자금까지 포함하면, 국내 자본시장을 떠받치는 기관 자금 규모는 과거 어느 때보다 커졌다. 벤처 및 사모펀드 시장에도 수십조원 규모의 드라이 파우더(투자를 집행하지 않은 자금)가 쌓여 있다. 

그러나 이제 그 유동성이 모든 기업을 동시에 끌어올릴 만큼 풍부하지가 않다. 즉 유동성장의 한계에 봉착했다. 자금은 계속 유입되는데 투자할 만한 자산은 무한하지 않다. 결국 자금은 가장 확실한 곳으로 몰리고, 그 과정에서 산업 전체가 아니라 소수 기업에 집중된다. 유동성이 산업 전체를 끌어올릴 수는 있지만, 모든 유동성장은 결국 종목장으로 귀결된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증시는 AI, 반도체, 전력 기기처럼 산업의 방향성만 맞혀도 수익률을 낼 수 있는 ‘산업장’이었다. 그러나 이제 시장의 관심은 테마가 아니라 실적으로 이동하고 있다. 같은 산업 안에서도 실제 매출과 이익을 내는 기업만 프리미엄을 받는 ‘종목장’이 열리고 있다. 산업장에서는 꿈을 샀다면, 종목장에서는 승자를 사야 한다.

시장은 생각보다 냉정하다. 또 생각보다 빠르게 바닥을 감지한다. 산업의 미래가 보이면 산업 전체를 사고, 그 기대치가 주가에 반영되기 시작하면 본격적으로 기업을 샅샅이 검증한다. AI가 성장한다는 사실, 전력투자가 증가한다는 사실, 반도체 업황이 개선된다는 사실은 더 이상 새로운 정보가 아니며 논쟁의 여지가 없다. 시장은 이미 그 기대를 상당 부분 가격에 반영했다. 

실제로 시장은 지난 수년간 수많은 테마를 경험하며 테마주에 대한 피로감이 누적됐다. 이차전지, 메타버스, NFT(Non Fun-gible Token·대체 불가 토큰), 로봇, AI까지 새로운 성장 산업이 등장할 때마다 산업 전체가 높은 밸류에이션 프리미엄을 누렸다. 그러나 산업 성장과 개별 종목 수익률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은 시간이 흐르며 여실히 드러났다.

금리 환경의 변화도 종목장을 재촉하고 있다. 저금리 시대에는 10년 뒤 실적에도 높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으나, 금리 인상기에는 먼 미래의 가능성보다 눈앞의 이익과 현금 흐름이 중요해진다. 그래서 같은 성장주라도 실적이 나오는 기업과 그러지 못하는 기업의 가치 차이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뿐만 아니라 산업 사이클상 AI가 본격적인 성숙 단계에 접어든다면 종목장이 펼쳐질 수밖에 없다. 시장은 더 이상 AI 성장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제 관심은 AI 산업구조에서 어디가 가장 많은 이익을 낼 것인가에 있다. 초기 산업 사이클에서는 산업 전체에 투자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어디가 승자가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이 성장하고 실적이 쌓이기 시작하면 시장은 자연스럽게 승자를 선별하기 시작한다. 

반도체 산업만 보더라도 이미 매출과 이익을 창출하는 기업만 선별적으로 프리미엄을 얻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분기마다 메모리 반도체 가격과 출하량이 가이던스를 상회하면서 컨센서스가 계속 상향되고 있다. 반면 같은 반도체 가치 사슬에 있더라도 실적이 미미한 일부 후공정·소재·장비 기업 주가는 정체되거나 시장 관심에서 소외되는 양상이 뚜렷하다.

미국 시장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보인다. 마이크로소프트(MS), 메타, 구글 등은 클라우드 매출 성장과 광고 효율 개선 등 실적을 보이며 주가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AI 관련 기대감만으로 주목받던 일부 소프트웨어 기업 주가는 부진하다. 이제 시장은 AI 인프라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의 투자수익률(ROI)까지 따지기 시작했다. AI 가치 사슬 전체를 보는 눈높이는 ‘얼마나 판이 커지는가’에서 ‘얼마나 돈이 되는가’로 더 엄격해지고 있다. 

물론 유망 산업을 선별하는 매크로적 접근이 무의미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산업 성장의 방향성을 읽는 것은 여전히 투자 전략에서 가장 중요하다. 어떤 산업이 구조적으로 성장하고, 어떤 산업이 정체기에 들어섰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종목을 선별하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다만 산업 선택만으로 초과 수익을 내던 시기는 지나가고 있다. 이제는 ‘어느 산업이 다음 주도주가 될까’라는 질문보다 ‘이 산업에서 실제로 수치를 확인할 수 있는 기업이 어디인가’라는 질문이 훨씬 중요한 시점이다.

산업장에서 종목장으로 전환은 투자자에게 이제까지와는 다른, 관점의 전환을 요구한다. 톱다운에서 보텀업(bottom-up)으로 개별 기업의 실적과 펀더멘털까지 검증해야 한다. 단순히 어떤 산업에 속해 있는지보다 개별 종목의 미래 실적을 추정하는 것이 투자 성과를 가를 것이다. 산업장에서는 꿈을 산다. 종목장에서는 승자를 산다. 지금 시장은 그 경계에 서 있다. 

엄여진 팔구십(Palgusip)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