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8일 서울 중구 환전소에 표시된 원·달러 환율. /사진 뉴스1
6월 8일 서울 중구 환전소에 표시된 원·달러 환율. /사진 뉴스1

원·달러 환율이 6월 한때 1560원에 다가서며 17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 수치가 불러내는 기억은 무겁다. 1997년에도, 2008년에도 환율은 위기와 함께 치솟았고, 그 경험은 환율의 상승을 곧 위기의 전조로 읽는 습관을 우리에게 남겼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물음은 환율이 얼마나 높은가가 아니다. 이 원화 약세가 단지 가격의 움직임인지, 아니면 금융 시스템 자체의 훼손인지다. 통화 약세와 시스템 붕괴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건이며, 둘을 뒤섞는 순간 진단도 처방도 어긋난다.

현물환 시장에서 원화가 약세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외환 위기를 진짜 위기로 만드는 것은 환율의 높이가 아니라 자금의 마름이다. 1997년과 2008년의 본질은 달러를 빌리고 굴리는 시장에서 달러 자체가 자취를 감춘 데 있었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외환 스와프 시장에서 달러 조달 비용을 가늠하게 하는 스와프 레이트는 위기 국면처럼 역전 폭이 벌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좁혀지고 있다. 만약 달러가 정말로 마르고 있다면 가장 먼저 문제가 생기는 곳이 바로 이 시장이지만, 이 시장은 현재 안정적이다.

박선영 -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 경제학, 미국 예일대 경제학 석·박사, 전 카이스트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교수, 전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
박선영 -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 경제학, 미국 예일대 경제학 석·박사, 전 카이스트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교수, 전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
개별 지표를 짚어 보아도 같은 결론에 이른다. 국가신용 위험을 반영하는 외국환평형기금채권 가산 금리와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역대 최저권에 머물러 있다. 외환보유액은 5월 말 약 4270억달러(약 659조6296억원)로 세계 12위 수준을 지켰다. 은행의 외화 지급 능력을 보여주는 외화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은 1분기 말 165.6%로 규제 기준(80%)의 두 배를 웃돈다. 경상수지는 4월 한 달에만 283억달러(약 43조7178억원) 흑자로 역대 두 번째를 기록했고, 6월 들어서도 1~20일 수출이 반도체를 앞세워 1년 전보다 60.4% 늘었다. 곳간이 비어가던 1997년과 2008년 풍경과는 정반대다.

한 나라의 대차대조표라는 관점에서도 한국은 더 이상 과거의 한국이 아니다. 외환 위기 당시에는 부채가 자산을 웃도는 순 채무국이었던 까닭에, 원화가 절하될수록 갚아야 할 외채 무게가 불어났다. 지금 한국은 순 대외 금융자산이 7536억달러(약 1163조7844억원)에 이르는 순 채권국이다. 원화가 약해지면 수출 기업 채산성이 개선되고, 해외에 쌓아 둔 자산의 원화 환산 가치도 함께 불어난다. 원화 약세가 국가 재무 상태를 갉아먹기보다 오히려 그 일부를 상쇄해 주는 셈이다. 

다만, 이 위안에는 단서가 따른다. 해외에서 번 돈이 현지에 재투자돼 본국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이득은 장부 위의 평가이익으로 남을 뿐 외환시장에 달러로 풀리지 않는다. 약세가 안기는 비용은 당장 체감되지만, 그 보상은 더디고 불확실하게 도착한다.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들어간 물음이 남는다. 어째서 원화는 같은 크기의 충격에도 다른 통화보다 크게 출렁이는가. 흔히 지목되는 것은 외환시장의 얕은 심도다. 그러나 그 얕음 자체가 우연이 아니라, 1997년 이후 우리가 의식적으로 누적해 온 정책적 선택의 산물이라는 점이 더 본질적이다. 

외환 위기의 기억은 ‘자본의 자유로운 유출입’이라는 표현 자체에 대한 경계심을 남겼고, 당국은 오랫동안 외환시장을 비교적 닫힌 형태로 운영해 왔다. 정부와 연구 기관 모두 우리 시장이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구조였음을 인정한다. 2023년의 외환시장 구조 개선 방안과 2024년 7월의 개장 시간 연장, 외국 금융기관(RFI) 참여 허용은 바로 그 닫힌 구조를 글로벌 표준에 맞춰 여는 작업이었다.

원·달러 환율이 1560원에 다가서자 1997년과 2008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환율 상승이 곧 외환 위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봐야 할 것은 환율 판의 수치가 아니라 달러 유동성, CDS, 외환보유액, 외화 LCR 등 시스템 지표다. 원화 약세는 고통스럽지만, 무너지는 시스템과는 구분해야 한다.

이는 이론적으로 익숙한 트릴레마(tri-lemma) 문제이기도 하다. 통화정책의 자율성, 환율 안정, 자본 이동의 자유는 동시에 모두 가질 수 없으며, 자본계정을 넓게 열수록 통화정책과 환율 가운데 하나의 재량은 그만큼 반납해야 한다. 

우리는 앞의 둘을 택했다. 그래서 자본계정을 전면적으로 개방하는 대신, 2010년의 선물환 포지션 한도와 2011년의 외환 건전성 부담금, 외국인 채권 투자 과세 재개 같은 거시 건전성 수단으로 자본 흐름을 다스리는 길을 걸었다. 

이들 조치는 위기 때마다 가장 먼저 흔들리던 은행의 단기 외화 차입, 즉 비핵심 부채의 경기 순응성을 정조준한 것이었다. 제도 도입 이후 한국이 글로벌 금융 여건의 변화에 보이던 과민한 반응이 실제로 누그러졌다는 실증 분석도 있다(발렌티나 브루노·신현송, ‘한국의 거시 건전성 정책 평가’, 2014, 스칸디나비아 경제학 저널). 소규모 개방경제인 데다 위험 회피 국면에서 경기 순응적으로 절하되는 원화 속성 역시 당국의 신중함을 정당화하는 본질적 배경이었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의 구상도 바로 이 지점에 놓여 있다. 달러 유동성이 양호한 만큼 환율을 금융 불안과 곧장 등치할 이유가 없다고 보면서도, 변동성이 과도해지면 개입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또한 환율 변동성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역외에 제대로 된 원화 결제 시스템이 없는 상항에서 실물 거래 없이 차액만 정산하는 역외차액결제선물환(NDF) 시장이 꼽힌다.

이에 대한 처방이 NDF 수요를 역내 선물환 시장으로 흡수하고 외국인 접근성을 넓히는 ‘원화 국제화’다. 이는 자본 흐름을 틀어막는 통제와는 다르다. 시장의 폭과 깊이를 키워 그 흐름을 더 또렷이 들여다보려는 시도이며, 통제와 감시를 구분한다는 점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이 권고해 온 점진적· 순차적 개방의 한국적 실행에 가깝다. 위기가 아니라는 진단과 환율 레벨이 아니라 시장구조를 손보겠다는 처방이 한 줄기로 만나는 셈이다.

물론 위기가 아니라는 진단이 곧 아무 문제가 없다는 선언일 수는 없다. 시스템이 건전하더라도 그 비용은 결코 고르게 나뉘지 않는다. 오른 수입 물가는 저소득 가계의 식탁을 먼저 압박하고, 높은 환율은 유학생과 여행자, 원화로만 자산을 쌓아 온 이들을 먼저 짓누른다. 반대편에서 수출 기업과 달러· 해외 자산 보유자는 이득을 본다. 거시 건전성은 미시의 고통을 면제해 주지 않기 때문에, 위기가 아니라는 판단은 정책이 멈출 자리가 아니라 비로소 시작할 자리다.

진짜 위기는 언제나 흔적을 남긴다. 스와프 레이트가 무너지고, CDS가 치솟고, 외환보유액이 방어 과정에서 급격히 줄고, 은행의 달러 조달이 막히고, 외화 LCR이 주저앉는다. 지금은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들여다보아야 할 것은 환율 판에 찍힌 수치가 아니라 이 지표다. 

1560원은 분명히 아프다. 그러나 아픈 것이 곧 위태로운 것은 아니다. 가장 필요한 것은 약한 통화를 무너지는 시스템으로 오인하지 않는 침착함이다. 구조에서 비롯된 약세는 위기가 아니며, 그 해답 또한 환율 수준을 관리하는 데 있지 않다. 시장을 더 넓고 깊게 하고, 자본의 흐름을 또렷이 지켜보는 역량을 키우는 일. 답은 그 바깥에 있다.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